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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향 Aug 19. 2017

산책을 하다가

일상의 메모 No.17

해질 무렵 강아지와 산책을 했다. 산책은 여유롭게 천천히 걷는 게 맞지만, 나는 평소 운동 삼아 빠른 걸음으로 걸어서 산책이 아니라 오히려 조깅에 가까웠다. 그런데 오늘은 더운 날씨 탓에 빨리 걷지도 못하고 강아지가 힘들어해서 의자에 잠시 앉아 쉬었다.  홍염 속에 쌓였던 열기가 서서히 식어가는 시간, 이따금 선선한 바람이 불어와서 인사를 건네는 듯했다. 무릎 위에 냉큼 올라 온 강아지의 등을 쓰다듬으면서 가만히 앉아 있었다. 나는 산책할 때마다 가던 걸음을 멈추고 정지된 상태로 앉아있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편이다. 빨리 가서 또 무언가를 해야 할 것 같은 강박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일단 의자에 앉고 보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빨리 걸을 때 보이지 않던 많은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의자 옆에 있는 나무 위에서 매미 소리가 귓가에 쟁쟁 울렸다. 가만히 살펴보니 작은 나무 한 그루에 매미가 여덟 마리 정도 붙어있었다. 내 눈에 띄지 않은 매미들까지 헤아린다면 엄청난 숫자다. 매미들은 가만히 있지 않고 조금씩 움직이고 있었다. 잠깐 한눈을 판 사이 적잖은 거리를 이동해서 다른 매미 곁에 가까이 다가가 있는가 하면, 두 마리가 나란히 붙어 있다가도 멀리 떨어지기도 했다. 한 마리가 울기 시작하면 동시에 다른 녀석들도 왕왕하고 울어댔다. 여름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아직 사랑을 이루지 못한 녀석들의 절박하고 처절한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수컷 매미들의 울음소리가 여름의 끝자락을 부여잡고 있었다.

 

매미 생각에 빠져있는 사이 초등학교 1학년쯤 된 남자아이가 매미채를 들고 겅중겅중 뛰어오고 있었다. 그 뒤로 동생으로 보이는 남자아이가 노란 채집통을 들고 따라왔다. 어린 시절 매미 잡기를 일삼던 기억이 떠올라서 두 녀석들을 자세히 관찰하기 시작했다. 형은 매미 잡는 방법이 많이 서툴렀다. 저 실력으로 어떻게 잡았을까? 채집통에 매미 몇 마리가 꼼지락대고 있었다. 이 나무 저 나무 매미들이 많으니까 몇 번이고 시도는 할 수 있었지만, 내가 보는 앞에서 단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 형은 매미를 발견하는 즉시 매미채를 갖다 댔다. 그럴 때마다 놀란 매미는 휭 하니 자리를 떠버렸다. 아쉬운 마음에 형은 날아가는 매미를 향해 매미채를 연신 휘둘렀다. 매미 잡는 실력이 부족한 것도 있지만, 자세히 보니 매미채 주둥이가 너무 넓어서 나무에 있는 매미를 조준하기에 적당하지 않았다. 학원에 갇혀있는 아이들에 비하면 아주 행복해 보여서 사랑스럽기까지 했다. 괜히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 몇 번이나 내 실력을 발휘해 볼까 하다가 그만 뒀다. 아직 짝을 찾지 못한 매미들을 지켜주고 싶은 마음이 더 컸기 때문이다.  


아기를 등에 업은 엄마, 유모차를 밀고 가는 엄마, 이어폰을 꽂고 힘차게 달리는 사람, 몸이 불편한지 느리게 걷는 할아버지, 강아지 산책 시키는 사람들로 공원은 점점 붐비기 시작했다. 매일 오늘처럼 여유롭게 느린 산책을 하면 어떨까? 그것도 매일 같은 시간에 산책을 한다면? 내가 무슨 상상을 하는 거야. 어차피 매일 같은 시간에 산책하기는 힘들다. 불가능한 일에 집착하지 않기로 하자. 오늘의 여운을 간직한 채 가끔씩이라도 산책을 하면 된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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