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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향 Jan 10. 2018

슬픔과 분노의 시간

영화, <1987>

특정 연도를 말하면 그때마다 떠오르는 이미지들이 있다. 1980년의 광주, 2001년의 뉴욕, 2002년의 광화문, 2016년의 광화문은 우리 모두 기억하는 연도들이다. 그 시기에 일어난 일들에 대해서 각자 기억하는 바와 느낌은 서로 다르겠지만, 그 시기가 우리에게 주는 분위기가 있다.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은 과거의 아름다운 추억의 아련함과 향수를 느끼게 하지만, 영화 '1987'은 슬픔과 분노를 느끼게 한다. 독재정권의 앞잡이들이 휘두르는 몽둥이에 죄 없는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철저하게 이용당한 뒤 버림받는 일이 난무하던 시절. 그런 현실에 맞서 ‘뭐라도 해야 되지 않겠냐!’는 마음으로 거리를 나선 사람들과,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잘못된 세상을 보고 잘못됐다는 것을 말하고 그에 맞서는 사람들. 영화는 그런 사람들에 대해 침울하지만 진정성을 담아 풀어나간다.

1987년 그 시절의 나는 중학생이었고, 서울이라는 곳은 한 번도 밟아 본 적 없는 미지의 땅이었다. 사춘기 소녀의 사소한 방황들로 뉴스 따위에 관심 없던 시기였다. 부모님이 켜놓은 텔레비전에서 띄엄띄엄 접하게 된 소식들을 어렴풋 기억할 뿐이다. 조금 더 크면서 역사책이나 영화, 다큐 등을 통해 우리의 아픈 역사를 이해를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영화를 보는 동안 중간중간 눈물이 났다. 내가 훌쩍이는 동안 내 옆 자리에 앉은 젊은 남자도, 앞자리에 앉은 아주머니도, 아저씨도 훌쩍거렸다. 영화를 보는 내내 가슴이 답답하고 울분이 터졌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 시절 이 땅에서 저질러진 만행들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일인지, 말도 안 되는 일이며 차마 입에 담기조차 무섭고 부끄럽게 느껴졌다.

우리가 중요한 역사적 사건들을 잊고 사는 동안, 중요한 의미들도 함께 잊고 지낸다. 특히 우리나라의 민주화 과정이 그렇다. 지금 우리가 누리는 민주주의는 앞선 자들의 굳은 의지와 용기 덕분이다. 저절로 지금과 같은 세상이 온 게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영화 ‘1987’은 말한다. 민주화를 위해 목소리를 내고 끝까지 용감하게 맞서 싸운 자들의 희생정신에 보답하라고. 그 보답은 바로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들이 이 나라의 주인으로서 과거와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잘 지켜내는 것이라고 말한다.  

시위대에 합류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냐며, 동참하지 않던 연희가 마지막에 버스 위로 올라가 팔을 높이 들고 목청껏 외치던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들으면서, 문득 나의 시민의식에 대해 점검해 보았다. 몇 년 사이에 벌어졌던 굵직한 사건들이 이 땅에서 여전히 자행되고 있고, 권력자들의 잘못을 비판하기 위해 거리로 나선 사람들이 넘쳐났다. 하다못해 어린 자녀들의 손을 잡고 거리로 나서는 일이 유행처럼 번지던 순간에도 나는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외면했다. 모두 다 나서서 참여할 수는 없으며, 소신껏 참여 의사를 보여주고 그 나머지 사람들은 묵묵히 자기 자리를 지키는 것도 필요하다고 생각했었다. 주변 사람들은 나처럼 생각하는 것 자체를 두고 참여의식이 결여된 사람이라고 비난을 할지도 모른다. 어쨌든 지금까지 그런 생각을 가지고 살아온 것만은 확실하다. 그렇다고 가해자의 입장을 옹호한다거나 이해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내 의사를 적극적으로 표현한다거나 시위대에 참가해서 목소리를 높일 의지가 부족했을 뿐이다.

영화를 통해 역사적 사실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됨과 동시에 연희의 행동 변화를 통해, 우리가 함께 생각해 봐야 할 문제가 생겼다. 그건 바로 우리의 시민의식에 대한 고민이다. 과거의 프랑스혁명과 굳이 비교를 하자면, 그들의 시위는 무서울 정도로 격렬하지 않던가. 시민 개개인의 작은 힘이 모여, 큰 힘이 되었을 때 세상을  바꿀 수 있다. 짓밟히고 부서져도 다시 손을 맞잡고 일어서서 행진해야만 하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현실. 과거의 수많은 시민들이 죽어가면서 견뎌낸 세월이 쌓여서 지금의 우리 역사를 바꿔놓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지금까지도 잘해왔지만 우리의 시민의식을 더 높일 때가 되었다. 이제 나도 용기를 낼 수 있을 것 같다.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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