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보다 단순하기에 더 따뜻한 금수禽獸

[시네마에세이스트] 환상의 마로나 리뷰

by 모퉁이극장

동물권의 향상은 계속해서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극단적으로 ‘식용 개는 따로 있다’라는 말을 하는 사람이 아직까지도 존재하고, ‘펫숍’에서 동물을 돈 주고 거래하는 것이 어떤 문제를 내포하는지 모르는 사람 또한 여전히 많다. 인간은 인간이기에 인간 중심적인 사고를 가지게 된다. 때문에, 동물권의 향상은 당연하게도 더욱 어려운 일이 될 수밖에 없다. 야생동물이 애완동물이 되고, 애완동물이 반려동물이 되기까지의 과정을 생각해 보면 이 과도기는 당연한 것이기도 하다. <환상의 마로나>는 이러한 과도기를 잘 드러내는 영화다. 동물에게 인격을 부여함으로써 인간에게 동물 감수성을 부여한다. 실제로 동물이 어떤 것들을 느끼는지에 대한 것은 과학적으로 많은 연구가 있지만, 여전히 정확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없다. 그렇기에 동물 또한 인간과 비슷한 존재로 여기고 존중하여야 한다. 인간은 자꾸만 먹이사슬을 넘어선 파괴를 일삼는다. 그들이 느끼는 고통에 공감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동물에게 ‘사이코패스’의 일종이 아닐까. 환경적으로도 자연적인 법칙을 넘어서는 인간은 가장 악한 존재다. 우선적으로 동물 감수성을 가져야만 많은 것들이 정상화될 것이고 종국엔 육식, 동물의 신체를 이용한 물건, 동물 착취의 소멸이라는 결과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환상의 마로나>의 주인공−이름이 자꾸 바뀌므로 주인공이라고 명하려고 한다−은 네 번의 인간을 만나며 이름 또한 네 번 정해진다. 처음 태어난 집에서는 아홉째라 ‘아홉’, 곡예사 마놀이 지어준 이름인 ‘아나’, 이스트반이 지어준 ‘사라’, 마지막으로 솔랑주가 지어준 이름인 ‘마로나’. 주인공은 원하지 않는 새 이름을 부여받는데도 결국에는 그 이름으로 살고 그 이름을 사랑하게 된다. 그리고 새 이름을 얻기 전 계속 필연적으로 이별을 겪는다. 주인공은 생존 욕구만을 원하지만 그것조차도 자꾸 잃는다. 그러나 주인공은 마냥 슬퍼하지만은 않는다. 이별의 순간마다 좋은 기억을 퇴적하고, 주인공에게는 가족을 이루었던 자와의 좋은 기억만을 뇌리에 강하게 남긴다. 추억이라는 것은 미화되기 쉬운 일이기에 영화를 보는 내내 마음이 더 아파진다. 주인공은 또 다른 이별을 막기 위해 위험한 차도를 내달린다.


인간보다 훨씬 짧은 인생을 가지고 있으면서 세 번의 삶의 전환까지 감내하는 주인공은 인간이 불쌍하다고 생각하는 것만큼 자기 연민이 없다. 주인공은 그 인간과 가족을 이루는 시간 동안 온전히 그 인간을 바라보며 산다. 오로지 자신의 자그마한 욕구만을 해소하고자 노력하고, 그렇게 ‘말 잘 듣는 개’가 된다. 그렇게 과정들을 지나면 주인공은 행복한 개가 된다. 본능적으로 그 과정을 알고 있는 주인공은 자신을 위해 움직인다. 주인공은 인간이 행복한 모습을 보기 위해 노력한다. 이는 인간을 위한 노력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본능과 더 가까운 주인공에게는 그것이 자신을 위한 행동이다. 영화는 시작부터 마로나의 시선으로 시작한다. 공포스러운 색채와 그림체로 시작하는 마로나의 첫 여정부터, 마로나의 관점으로 보이는 인간들의 행동들은 인간 중심적인 사고를 벗어난 인간의 동물적 시선임에도 그럴듯하고 뒤통수를 맞은 것처럼 충격적이기도 하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마로나는 인간을 위해 산 것이 아니라 본능에 의한 움직임이었다고 생각한다. 제가 좋아하는 인간이 행복한 모습을 보고 싶어 주체적으로 움직인 것이지, 자신의 의지가 아닌 강제로 행한 일은 전혀 없다. 동물은 본능에 더욱 가까운 존재로 여겨지고, 그렇기 때문에 인간보다 단순하다고 할 수 있으며, 그렇기에 인간보다 선하다. 마로나가 마지막으로 보는 세상의 색채는 따뜻하고 부드럽다. 그러나 <환상의 마로나>가 인간 중심적인 사고에서 벗어나는 영화라고 해도, 이것 또한 인간의 시선일 테다. 이 영화는 인간의 영화다. 인간이 동물의 입장에서 완전히 생각할 수 있을까? 그렇기에 우리는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최소한 말하지 못하는 동물들이 괴롭지 않도록.


<환상의 마로나>에서는 개를 대하는 다양한 사람들의 태도가 등장한다. 개를 물건처럼 취급하는 이스트반의 부인부터, 자꾸 마로나를 쫓아내겠다고 말하면서도 산책을 시키고 예뻐하는 솔랑주의 할아버지, 그리고 아나를 데리고 갈 수 없다는 극단의 말에 원하던 삶을 포기하는 마놀까지. 사람들이 이 영화를 보면 분명 자신이 동물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 돌아보게 될 것이다. 나 또한 어느 쪽에 속하는지 생각해 본다. 이는 간접적으로 세상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보고 동물을 조금 더 위하는 하는 바람이 커진다.


주인공은 인간들의 행복 기준이 높다고 생각한다. 주인공에게는 지낼 수 있는 공간과 먹을 수 있는 식사만 있으면 되니까. 여기서는 쉽게 행복하기 위한 방법을 알게 해주는 것 같기도 하다. 인간보다 조금 더 단순한 주인공은 인간이 고통이라고 생각하는 삶을 살아오면서도 행복한 기억만을 안고 있다. 우리도 조금은 단순해질 필요성이 있지 않나 싶기도 하다.


이별을 평생 소중한 기억으로 안고서 이별하지 않기 위해 달리는 마로나는 눈물겹게도 사랑스럽다. 동물들이 마로나의 마지막 시선처럼 따뜻하고 부드러운 세상에 도달하기를 바란다. 세상은 갈수록 따뜻해지지만 동물들은 여전히 따뜻한 존재일 것이다. ‘우리의 언어를 인간들은 못 알아듣지만, 우리는 인간의 언어를 알아들어야 해.’ 라는 말을 하지 않아도 따뜻한 동물들이 위협적이지 않은 세상에 도착하기를 바란다.

본 리뷰는 시네마에세이스트 최현지님이 작성해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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