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마에세이스트] 환상의 마로나
내가 기억하는 내 삶의 첫 반려동물은 강아지 ‘하니’이다. 하니는 내가 초등학교 3학년 무렵, 어느 날 갑자기 우리 집에 짠! 하고 나타났다. 평소와 다름없던 주말 아침, 눈 비비며 일어나 방문을 열고 나왔더니 거실 한편에 못 보던 강아지가 몸을 둥글게 말고 자고 있었다. 정말로 내 눈앞에 별안간 ‘짠~’하고 나타났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등장이었다.
여느 어린이들이 그렇듯 그동안 우리 남매는 부모님께 강아지를 키우고 싶다고 무던히도 졸랐다. 귀에 딱지가 앉도록 졸라댔지만, 쇠귀에 경 읽는 것처럼 미동도 하지 않던 부모님이었다. 공부 열심히 하겠다, 부모님 말씀 잘 듣겠다, 심부름은 시키는 대로 하겠다는 등의 온갖 감언이설에도 넘어가지 않던 부모님이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 강아지를 데려오셨을까.
부모님 두 분 다 동물을 매우 좋아하는 분들이셨다. 시골 출신들이라 어릴 적부터 소, 닭 등 가축 동물들을 키우고 살아서 동물들과 친숙하기도 하셨고, 그만큼 동물과 관련한 기억도 많이 갖고 있었다. 우리 남매가 강아지 키우게 해달라고 합창을 하면 아빠는 당신이 우리 나이만 할 때 키웠던 동물들의 이야기를 해 주셨다. 어느 날 하교하여 집에 왔더니 너무 맛있는 고기 냄새가 나서 반색을 하며 먹었는데 알고 보니 집에서 애지중지 키우던 토끼였다는 것과 집에서 키우던 암캐 발정기가 오면 온 동네 수캐들이 집 앞에 몰려와 북새통을 이루던 일, 어미 소가 송아지 낳던 날이랑, 그 송아지랑 헤어질 때 어미 소가 얼마나 구슬피 우는지 등등.
마음이 여린 부모님은 다른 무엇보다 동물들과의 헤어짐이 마음 아파 애정을 주고 동물과 관계를 맺고 싶지 않다고 하셨다. 동물을 키워본 적이 없는 우리 남매는 아빠의 마음이 무슨 마음일지 당연히 헤아리지 못했다. 그저 못 키우게 하는 것이 불만이었을 뿐.
어느 날 부모님은 모임에 참석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육교 위에서 강아지들을 상자에 모아놓고 파는 노점 할머니를 만났다. 부모님은 그 상자 속 강아지들을 둘러보던 중 뒷발에 발가락이 하나 더 달린 황토색 믹스견을 발견하고는 삼천 원을 주고 집에 데려왔다. 육손(발)이여서 마음이 더 쓰였던 탓이었을까. 부모님께 선택받은 하니는 우리 집으로 와서, 세 남매와 살게 되었다.
하니는 체구가 자그마한 믹스견이었는데, 제법 똑똑했다. 눈치가 빨라 치고 빠지는 때를 잘 알았다. 하니를 키울 때 살던 집은 마당이 꽤 넓은 집인데다 개를 묶어 기르지 않아서 열린 대문을 통해 집 마당과 집 밖 동네를 오가며 자유롭게 다녔다. 심지어 신호등의 파란불, 빨간 불도 알아서 빨간 불에 앉아있다 초록 불로 신호가 바뀌면 하니가 제일 먼저 횡단보도를 건넌다는 동네 사람들의 제보도 받았다.
어느 날 하니가 갑자기 사라졌다. 우리 가족이 동네를 이 잡듯 뒤지고 다녀도 나타나지 않았다. 어디로 간 것인지 짐작도 되지 않았다. 우리 남매는 그날 이불 밑에 둘러앉아 눈이 퉁퉁 붓도록 울었다. 며칠 뒤, 주말 이른 아침 부슬비가 내리는데 하니가 목에 전깃줄이 묶힌 채 나타났다. 누군가에게 잡혀 전깃줄에 묶여 있었던 걸 하니가 이빨로 끊어내고 도망쳐 온 것 같았다. 우리를 만나 힘차게 꼬리를 흔들어대며 반가워하는 하니를 보니 대견하고 대견해 눈물이 차올랐다. 하니가 말을 할 줄 알았다면 ‘하니의 대모험’ 이야기를 들려줬을 것이다.
어느 날 내가 도로 건너편으로 건너갈 일이 있어 무단횡단을 하는데 하니가 뒤따라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그 도로는 양방향 2차선 도합 4차선 도로였는데, 지금처럼 차가 굉장히 많지 않았고 신호등이 있는 횡단보도는 조금 더 길을 거슬러 올라가야 해서 종종 무단횡단을 하던 곳이었다. 하니가 뒤따라오고 있는 것에 놀란 내가 “하니야, 오지 마” 하고 소리쳤는데, 하니가 내 목소리를 듣고 엉거주춤하다가 달려오는 차에 부딪힐 듯 스치고 지나갔다. 나는 하니가 차와 부딪히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아마도 부딪히긴 했던 모양이었다. 비실비실하더니 픽 쓰러졌다. 내가 놀라서 쓰러진 하니를 들고 나와 인도에 눕혔다. 피 한 방울 나지 않고 온전한 모습 그대로인데 눈을 감고 미동도 하지 않아서 어찌 된 영문인지 어린 나는 알 수가 없었다. 무단횡단을 하던 곳은 큰아버지가 운영하는 목재소 앞이었는데, 아빠가 그 목재소에서 일하셨다. 나는 하니를 목재소 입구 귀퉁이에 눕히고 목재소 사무실로 뛰어들어가 아빠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아빠가 나와서 같이 하니를 살펴보는데 너무 겉모습이 멀쩡해서 죽은 것 같지 않았다. 너무나 갑작스레 찾아온 죽음을, 신체가 하나도 손상되지 않고 온전하게 잠자고 있는 것 같아 믿을 수 없었다. 하니는 우리 집 마당 한구석에 묻혔는데 생각이 날 때마다 하니가 묻힌 정원 구석으로 가서 앉아있곤 했었다. 하니와의 추억이 나를 동물을 좋아하는 마음을 지닌 사람으로 만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도 어른이 되어서는 부모님처럼 반려동물을 들이기가 망설여졌다. 대부분의 경우에 반려동물이 양육자보다 먼저 죽게 될 텐데 그 헤어짐이 두렵기도 하고 번거롭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 마음은 결혼해 양육해야 할 자녀가 태어나면서 더욱 커졌는데, 아들 둘 육아도 힘든 데다, 뒤치다꺼리를 해줘야 하고 마음을 써야 하는 존재를 추가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둘째 아들이 6살이 되었을 때, 아이들이 고양이를 키우고 싶다고 본격적으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아들 둘의 고된 육체적 육아기의 정점이 지났을 때라 나도 슬금슬금 고양이를 키워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고백하건대, 사실 그 생각이 순수하지만은 않았다. 반려동물을 키우면 아이들 정서발달에 도움이 되고 동물을 좋아하고 아끼는 마음이 들지 않을까 하는, ‘아이’의 정서발달에 방점이 찍혀있었다. 그런 식으로 반려동물을 도구화 하고 싶진 않지만, 그런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환상의 마로나>라는 애니메이션에는 아빠가 우수한 품종의 사냥개이고 엄마는 잡종인, 종을 뛰어넘은 사랑 속에서 9남매 중 ‘9번’으로 태어난 갈색 털의 잡종 개가 나온다. 눈먼 사랑, 종을 초월한 사랑의 증거였던 9번 강아지는 혼자 아빠네 집에 들어갔다가 이내 버림받아 길거리 쓰레기통에 버려지게 된다. 이후 9번은 거리의 곡예사 마놀을 만나 ‘아나’라는 이름을, 공사장 건설업자인 이스트반을 만나 ‘사라’라는 이름을, 어린 소녀 솔랑주를 만나 ‘마로나’라는 이름을 갖게 된다. 이 영화는 마로나의 죽음의 순간에 주마등처럼 지나가는 지난날의 견생(犬生)을 세 주인을 따라 그려내고 있다. 우연히 강아지를 키우게 되었으나 인생의 갈림길에서 강아지가 걸림돌이 되는 마놀, 동거인 때문에 사라를 키우기 어렵게 된 이스트반, 어린 시절 순수한 호기심으로 데려왔지만 이내 귀찮아진 사춘기 소녀 솔랑주 등 강아지의 시선에서 본 반려 인간의 모습과 그들에게 애정을 한없는 애정을 선사하는 이야기가 담겨 있다.
“개와 인간의 행복은 다르다. 개는 늘 지금이 제일 좋지만 인간은 늘 새로운 걸 추구한다. 보금자리가 있음에도 더 많은 걸 원하는데 인간들은 그것을 꿈이라고 부른다.”
“그날 밤 배운 게 있다. 매일 마지막인 것처럼 내 인간의 얼굴을 핥을 것. 언젠가 정말 마지막이 될 것이므로.”
“이게 개의 행복이다. 자는 동안 지켜줄 인간을 갖는 것.”
“인간은 참 이상한 동물이다. 행복이 작은 데 있음을 알곤 한다.”
영화를 보는 내내 나의 첫 강아지 하니가 생각나 가슴이 아팠다. ‘품종‘이 아닌 ‘종(種)’을 초월한 사랑이 있다면 그건 인간과 반려동물 간의 사랑일 것이다. 내 강아지, 하니를 존재 자체로 사랑했었던가? 지금 키우고 있는 고양이 ‘먼지’는 단지 아이들의 정서발달을 위한 도구일 뿐인가? 반려동물과 함께 지냈던 지난 시간들을 꺼내보며 하니가 자동차에 치여 무지개다리를 건널 때 그녀 일생의 영화를 어떻게 돌려봤을지 궁금했다. 내가 하니를 만나 너무 좋았던 만큼 하니의 환상 속에서 하니가 행복했었기를, 그리고 내가 지금 키우고 있는 고양이 먼지를 존재 자체로 사랑할 수 있기를 바라본다.
본 리뷰는 시네마에세이스트 모리님이 작성해 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