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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로지 Nov 08. 2021

화장대 위의 화장품을 전부 치우던 날

희생은 포기라고만 알았는데 사실 채워지는 기쁨이었다니



'이제 아기침대는 졸업해야겠는걸?'


어느새 많이 자라 신생아 시절부터 쓰던

아기침대에 이리 쿵 저리 쿵 머리를 박으며

밤새 뒤척이던 너를 보고

새 침대를 알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 이렇게 커버렸을까-


키도 몸무게도 태어날 때보다

두배가 훨씬 넘는 너를 보며 감탄할 새도 없이

휴대폰을 켜서 '신생아 침대 졸업' 검색을 시작했다.


바닥 생활을 할 것인지 침대생활을 할 것인지부터

어느 브랜드의 어떤 프레임이 튼튼하다더라

매트리스는 따로 구입하는 게 더 낫다더라 등

 

며칠 밤을 고민하고 또 고민하다가

결국 단점은 가격뿐이라는 침대를 사게 되었지.

이런 게 부모의 마음일까?


뭐든 좋은 것이라면 다 해주고 싶은 마음.


며칠을 검색 또 검색하며 가격을 비교해도

결국 마음이 기우는 쪽은

최고로 안전하고 최고로 좋아 보이는 침대.


그리고 그 침대가 들어오기 하루 전 날

우리 집 안방을 쓱 한번 훑어본 뒤에


나는 안방의 화장대 위에 화장품들을

전부 정리해 치워 버렸다.


좁은 안방에 너의 새 침대 자리를 준비하기 위해

화장대는 자리를 양보해야 했으니까


아직 포장도 뜯지 못한 유명 브랜드의 화장품,

기분에 따라 바르던 여러 색의 립스틱들,

샤워하고 난 뒤 꼭 뿌리던 향수


한 때는 애지중지 아꼈던 화장품들은

서랍 속에 대충 던져두었다.

한동안 이제 꺼낼 일은 없을 테니 아예 새 제품들은 지인들에게 나눔도 했다.


너를 만나기 전엔 집 앞 슈퍼를 갈 때도 화장을 하고

출근을 준비하며 설레는 마음으로

화장대 앞에 앉던 나였는데


한참 신혼일 때는 잠들기 전에야 화장을 지울 만큼

맨얼굴을 보여주기 싫어하던 나였는데


이상하게도 화장대를 치우는

그날 나는 하나도 서운하지 않았다.


거울 속에 헝클어진 머리에

맨얼굴인 내가 미워보이지 않은 것처럼.


너를 안아주고 밥을 주고

트림을 시켜주고 토닥여주는 그 시간 동안


켜켜이 먼지만 쌓여가던

화장대를 보낼 때의 내 마음은

그저 너에게 소중하고 포근한 밤이

찾아오기만을 바랄 뿐.


막연하게 두렵기만 했던

내 공간의 틈을 내어 너에게 내어주는 일은

그저 기분 좋은 일이었다.


화장한 내 모습보다

맨 얼굴로 너에게 살을 부비는 일이 더 좋은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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