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로지 Sep 12. 2023

출산가방 준비할 때 알았으면 좋았을 걸

우리가 어쩌면 서로를 미워하게 될 수 도 있다는 걸

출산가방을 한참 준비하던 임신 막달 그 쯤, 나는 어쩌면 그때 이미 알았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출산가방을 준비하는 일보다

태어날 아이의 이름을 짓는 일보다

내 맘에 쏙 드는 조리원을 알아보는 일보다


내가 먼저 (마음의) 준비 해야하는 일이 있었다는 걸.

아이가 첫 돌이 지났을 무렵에 나는 내가 아주 중요한 걸 놓치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러니까 2년 전쯤이었다.


아이가 신생아 시절 무렵, 아이가 잘 때 따라서 자라는 선배맘들의 충고를 흘려보내고

아이의 낮잠시간에 육아 용품, 장난감 그리고 아이가 다음 개월수에 꼭 해야 할 일들을 알아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러다 우연히 인스타그램의 수많은 사진들 속에서 이 책 제목이 눈에 확 들어왔다.

'아이를 낳은 후에 남편을 미워하지 않는 법'

참으로 발칙하고도 재밌는 제목이구나 싶었다.


아이가 태어나고 나니 미워하고 싶지 않아도 미워하게 되는 남편이라는 존재.

(물론 그 반대의 상황도 마찬가지)


사실 아이가 태어나면 부족한 잠, 도저히 한 사람으로는 힘든 육아를 같이 해나가야 한다는 점

이런 것들이 부부 사이를 힘들게 한다는 걸 뼈저리게 느끼고 있던 중이었다.


그렇게 책의 표지를 찬찬히 살펴보다가 작게 써진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카시트를 고르는 것보다 더 중요한


그때 아차 싶었다.


남편을 미워하지 않는 법이라는 제목보다

내 마음을 크게 울렸던 '카시트를 고르는 것보다 중요한'이라는 문구


사실 나는 아이의 행복을 위해서 좋은 카시트를 고르고 유기농 기저귀를 사고

이 개월수에 맞는 장난감을 검색해보고 있었지만 정작 우리 부부는 괜찮은 건지 돌아보지 못하고 있었다.


서운할 일이 생기면 뚱한 표정으로 각자 기저귀를 치우고 젖병을 설거지하고 아기옷 정리를

뚝딱 해내가며 어느새 육아동지로 변해있는 우리.


우리 이대로 괜찮은 걸까? 생각이 들곤 하지만 이내 정신없이 바쁜 하루 속에 우선순위가 뒤로 밀려나곤 한다.


시계가 6시에 점점 가까워지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우리의 멘트

'오늘은 몇 시에 퇴근해?'


퇴근시간이 5분만 늦어져도 온 신경이 곤두선다. 그 5분으로 세상이 바뀌는 것도 아닌데

예민해진 나는 자꾸 쫓아가며 재촉하는 사람이 되고 남편은 쫓기듯 도망가는 사람이 된다.


사랑해서 결혼을 했고 둘 사이에 아이가 태어났는데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더 멀어져 있었다.






그저 ‘ 남편들은 다 왜 그럴까?! ’라며 치부해 버리고

우리 부부의 부딪힘을 맞서거나 혹은 고치거나 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안부를 묻는 대신 아기 밥은 잘 챙겨줬냐는 말이 먼저 나오고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 한없이 넓었던 남편을 향한 내 이해력과 포용력도 점점 좁아지는 듯했다.


거기다 가끔 우리는 도저히 타협할 수 없는 어떤 지점에서 서로를 끝내 받아들이지 못한 채 놔두기도 했다.

분명 아이가 태어나기 전까지 우린 사랑하는 사이였는데 말이다.



티격태격하면서도 우리의 일상은 굴러가니까


남자들이 다 그렇지 뭐라고 핑계를 대기도 하고

내 호르몬의 영향이라고 스스로 합리화하기도 했던 날들.


그러면서 좋았다가도 나쁘기도 하지만

결국 우리는 부부니까 라며 관심을 주지 않았던 부부의 세계, 나는 그 세계를 되돌아볼 필요를 느꼈다.


그리고 우리가 아이가 태어나기 전 신혼이라고 불렸던 그 시절처럼 다시 돌아갈 수 있을지 궁금해졌다.


남편에게 언제 퇴근하냐고 재촉하지 않을 수 있을까?

아이를 볼 때의 그 눈빛으로 남편을 다정히 불러볼 수 있을까?

불평과 불만이 쌓이기 전에 서로의 필요를 충족시켜 줄 수 있을까?

어쩌다 못 지키게 되는 약속에도 한없이 관대해질 수 있을까?

주말 아침 친구를 만나러 나가는 상대를 쿨하게 보내줄 수 있을까?








'아이를 낳은 후에 남편을 미워하지 않는 법' 책에 나오는 수많은 해결책들,

남자라는 생명체를 이해하기 위한 공부 아닌 공부들.


이런 것들을 알고 나면 우리 이제 괜찮을 걸까?

책을 읽으면서도 의문점으로 남았다.

그러다 문득 나보다 먼저 육아를 시작한 친구를 만났을 때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너는 그래도 그 지옥 같은 시간(신생아 시절)을 잘 지내왔구나'


그 말에 나는 의외의 용기를 얻었다.


아이가 태어나고 우리 부부가 깜깜한 어둠 속을 한발 한발 떼기 위해 실험했던 여러 가지 것들이 생각났다.

그리고 이런 우리의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 글로 써보면 어떨까 생각이 들었다.


아직은 우리도 가끔은 서로에게 날 선 차가운 말을 건네기도 하고

언제부터 내가 이렇게 차가워졌지? 싶을면서도 그래도 미워라는 마음이 불쑥 고개를 내민다.


내가 왜 이렇게 날이 서있지 싶으면서도

아직 서로 사랑하는 마음은 같은데 하면서

아냐 내가 느끼는 이 감정은 틀리지 않았어 라며 혼란스러운 나날들이 계속되고 있다.


부부니까 어디까지 이해해줘야 할까 싶으면서도

부부니까 이 정도는 해줄 수 있지 않을까 의 경계에서 아직도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어느새 우리 대화의 중심엔 아이가 있고 아이를 빼면 우리는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을지 모를 때가 있다.


그래도 그 시간들을 잘 헤쳐 나왔으니 앞으로도 남은 숙제들을 잘 해결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 글을 시작했다.


어쩌면 우리의 이야기가 출산가방을 준비하고 있는 누군가에게 작은 울림이 되길 바라면서.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