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생각보다 나는 빠르게 업무에 적응해 나갔다.
누구도 내게 기대감이 없다고 느끼자 한결 가벼워졌다.
입사 첫날 팀장의 말 그대로 내 출근길엔 부담감이 없었다.
매일 같은 시간에 일어나 갈 곳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곳엔 내 자리가 있고 내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나를 기다린다는 것.
나는 다시 일을 시작하면서 일에 대한 재정의가 필요하다고 느꼈다.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한 행위라는 그 이면에 무언가 있었다.
좋은 것 혹은 나쁜 것이라고 정의할 수 없는 어떤 것.
그래서 일을 마치고 돌아와 누운 침대에서 종종 일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보곤 했다.
어쩌면 그동안 내게 회사는 늘
불특정 다수에게 나의 존재 이유에 대한 입증을 계속해야 하는 곳이었을까?
인정받기 위해 인정받아야 하기에 해내지 못하는 나를 부정했던 날들.
그런데 이곳에서는 전혀 그런 느낌을 가질 수 없었다.
다른 부서에 비해 우리 팀은 조용한 편이었는데
그리고 내 옆자리의 이 과장은 우리 팀에서 말수가 가장 많았다.
내가 입사하기 한 달 전 이 팀에 오게 된 그는
같이 일을 할 때면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이것저것 알려주는 편이라 같이 일하기 편했지만
어떻게 보면 본인을 어필하는데 굉장히 신경 쓰는 편이었다.
인정받기 위해 늘 안달 난 느낌이었다.
그는 종종 야근을 하곤 했는데, 그를 제외하고는 우리 팀에 누구도 야근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
"과장님, 오늘도 야근하세요?"
"그래야 할 것 같아요.. 저는 입사한 지 꽤 되었는데 이제 1인분 해야죠"
'누가 시키지 않아도 야근을 하는구나...'
속으로 생각하며 먼저 가보겠다고 인사를 하고 나왔다.
야근에도 종류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런 건강한 야근도 있구나 싶었다.
그런데 다음날 이 과장으로 인해 우리는 모두 회의실로 불려 갔다.
팀장은 우리를 모두 회의실로 불러놓고는 안경을 한번 쓱 올리곤 말했다.
"특별한 상황이 아니면 우리 팀은 야근을 하지 않도록 했으면 해요"
흐르는 침묵 속에 팀장은 말을 이어나갔다.
"업무가 많으면 일정을 조율하면 되고요. 그건 저에게 말씀하시면 돼요.
새로 오신 분들이 야근을 종종 하는 것 같은데... 이 과장님, 지금 업무 많으세요?"
"아 아닙니다. 그런데 오늘 꼭 기한을 맞춰야 하는 일도 있어서요."
"일의 우선순위를 정해서 진행할 수 있도록 해주세요. 그래도 안되면 제가 일을 조정하도록 하고요"
팀장이 시선이 나를 향했다.
"장대리님, 이 과장님 업무가 과중되는 것 같으니 대리님이 업무를 나눠 받는 걸로 하죠, 괜찮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