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3.25
퓌센에 도착하니 한겨울이다. 눈이 너무 많이 내려서 오자마자 다시 뮌헨으로 돌아가는게 낫지 않을까 싶었다. 함부르크나 베를린을 가지 않고 뮌헨과 퓌센을 선택했던 이유는 독일의 남쪽이어서 따뜻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는데 오산이었다. 아침에 9시 30분 쯤에 뮌헨 뉴하이젠 유스호스텔에서 나와 30분정도 근처 슈퍼를 탐방했다. 브뤼셀에 온 뒤로 쥐비와 같은 할인몰에서 장보는 재미를 들여서 그런지 뮌헨에서 했던 일 중에 제일 즐겁게 했던 거 같다. 손이 너무 거칠어져서 핸드크림과 퓌센에 가면서 먹을 뻥튀기 과자와 살구 한 봉지를 샀다. 3유로가 안되는 간단한 물품이었지만 내게 가장 필요했던 물건들이어서 그 가치는 30유로에 맞먹는 기분이다.
아침식사가 꽤 괜찮아서 하루종일 빵을 더 먹고 싶은 생각이 안 들었다. 이제 제법 빵을 내 취향에 맞게 먹는 방법을 터득해서 나만의 방식으로 맛있는 샌드위치 빵을 만들어서 배불리 먹었다. 또 몇 개 가져갈까 했는데 짐도 많고 보관하기도 힘들거 같아서 쵸콜렛 몇 개만 가져왔다.
지하철을 타고 중앙역으로 간 뒤에 바이에른 티켓을 사고 다시 19번 트램을 타고 시청가로 가려고 했다. 짐이 너무 무거워서 어제처럼 종점까지 갔다. 개인 드라이버를 고용하면 누릴 수 있는 드라이브 코스라고 할까 시내 중심가를 좀 벗어나니 근교는 휑한 느낌도 들었지만 독일의 곳곳은 유럽 그 어느 곳 못지 않게 거리가 예뻤던 거 같다. 그러다가 종점에서 관광책자와 우리은행 국제 학생증 카드 설명책자를 보다가 무거운 짐을 들고 박물관에 가면 좋을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도이치 박물관으로 일정을 바꿨다.
막스베버 플라츠에서 17번을 타면 바로 갈 수 있을 거 같았는데 17번은 밤에만 운행한다는 어떤 사람의 얘기를 듣고 18번을 타고 네 정거장 정도 가니 도착할 수 있었다. 독일 박물관이라고 해서 독일의 역사과 독일을 기념할 만한 작품들이 있을 줄 알았으나 인류 역사의 전 분야를 망라하는 것들을 전시해 두었다. 욕심내서 볼 생각도 안했고 1시간정도 시간을 때우려고 했기 때문에 관심이 있는 분야만 봐야 겠다고 생각을 했는데 그래도 2시간 넘게 있었던 거 같다. 오래된 피아노의 건반도 눌러보고 현악기도 볼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흥미로웠던 것은 변덕스러운 유럽의 날씨에 좀 질려있었기 때문에 이상기후 현상을 설명하는 환경 부분이었다. 한 때 환경공학자가 되겠다는 꿈을 갖고 있어서 환경 부분을 좀 보고 싶었나보다.
독일의 박물관에서 느낀 점이라면 독일 어린이들이 자연스럽게 역사, 과학, 음악들을 박물관에서 접할 수 있게 해두어서 재밌게 공부를 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한국에서는 박물관이라고 하면 지루하고 엄숙한 분위기를 떠올리지만 독일은 전혀 그렇지 않았던 거다. 전시장 곳곳에 쉴 수 있는 의자들이 놓여있고 사진도 자유롭게 찍으면서 박물관을 놀이터 삼아 놀수 있는 거였다. 어쩌면 독일이 세계 1차 대전의 패전을 겪고 선진국이 될 수 있고 경쟁력을 갖출 수 있었던 건 자연스러운 박물관 문화가 아니었나 싶었다. 그냥 나의 추측일 뿐이긴 하지만 말이다. 독일에 와서 아이들을 어른들보다 더 많이 본 거 같다.
박물관에서 2시쯤에 나온 뒤 이사도라 라는 S반 정류장으로 가서 s반을 타고 중앙역으로 갔다. 역근처에서 젤라또를 먹으면서 여유롭게 28번 승강장으로 향했다. 퓌센으로 가는 RE선은 아주 여유로웠다.
차창이 얼룩덜룩해서 드넓게 펼쳐진 초원과 독특한 독일 가옥들을 보는 데 조금 흠이 되긴 했지만 내가 늘 상상했던 유럽의 풍경들이 차창 밖으로 펼쳐지고 있었다. 이 멋진 광경을 나 혼자 봐야 한다니..... 하는 마음이 또 들었지만 다시 마음을 추스르고 다른 생각들을 해봤다. 나를 둘러싼 사람들에 대해서 내가 지금 느끼고 있는 것들을 영어로도 생각해보면서 지루한 시간들을 때웠다.
독일에서 트램이나 지하철을 기다리다보면 얼마나 기다려야 하는지 전광판에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렇듯이 나의 연분이 나의 짝을 얼마나 더 기다리면 만날 수 있는지 알 수 있다면 괜찮을 거 같았다. 오로지 주님만이 아시겠지.......
멋진 풍경이 지나갈 때 폴모리아의 기타 연주곡을 들을 수 있었는데 아빠와 함께 있는 기분이었다. rain and tears 가 나올 때도 마찬가지였다.
4시 50분쯤에 퓌센에 도착했다. 퓌센은 한겨울이었다. 눈이 수북히 쌓여있었고 눈보라가 몰아칠 정도였다. 서울에서 이런 눈을 봤다면 문자를 보내고 좋아서 어쩔 줄 몰라했을텐데 어쩐지 유럽에서 눈을 보면 짜증이 좀 났다. 세상에나.... 내가 이렇게 변하고 있나보다. 한국에서 눈을 봤던게 작년이었나?
11월 19일 첫눈 오던날....
퓌센에서 눈구경을 실컷 하고 갈 듯싶다. 내일 눈을 보면 다시 아주 기뻐해야 겠다^_^
퓌센이라는 유스호스텔을 찾느라 조금 애를 먹긴 했다. 가방에 쌓인 눈은 얼음이 되었고 얼굴에 눈을 너무 많이 맞아서 얼굴이 얼어붙을 정도였다. 너무나 예쁜 설경(雪景)이었지만 유스호스텔을 찾을 생각에 너무나 막막했다. 그래도 호텔의 리셉셔니스트가 너무나 친절하게 내가 갈 곳을 가르쳐줘서 감동을 받았다. 오늘 눈길을 걸으면서 가장 힘이 들었던 거 같다.
숙소를 찾지 못할 거 같은 불안함과 낯선 곳에 나 혼자라는 생각이 들면서 털썩 주저 않고 싶었던 거 같다. 그래도 멀지 않은 곳에 유스호스텔이 있었기 때문에 안도했다 다행이다!
그리고 지금 내가 유스호스텔 복도에 있는 의자에 앉아서 이렇게 가장 긴 길을 끄적이고 있는 이유는 10번 방이 좀 어둡고 냄새가 나서이기 때문이다. 며칠 동안 계속 입고 다니던 내 물건들과 다른 룸메이트들 역시 긴 여행을 하느라 갖게 된 독특한 냄새가 섞여서 좀 불쾌하다. 하이델베르크 유스호스텔의 이틀밤을 잊지 못할 것이다. 가장 아늑하고 깨끗하고 넓직한 곳에서 아무것도 구애받지 않고 나만의 시간을 즐길 수 있었던 하이델베르크!
내일은 퓌센 호스텔에 혼자 묵을 수 있을 수 있으면 좋겠다. 아니 혼자가 아니어도 좋으나 냄새가 적어도 안 났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