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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현 Dec 31. 2017

절대적인 것은 없다.


 절대적인 기준은 없다.


 인간에겐 오감이 있고 그에 따르는 욕구가 있다. 욕구의 단계를 나누면 의식주에 해당하는 기본적인 욕구가 피라미드 형태의 제일 아래 단계에 나타난다. 보통 이 기본 욕구를 만족해야 인간의 기본 생활이 유지된다. 가끔은 보통, 인간의 시선에 독특하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이 나타난다. 그들은 어딘 가에라도 존재한다. 그리고 그들은 살아가는 방식을, 자신만의 처세술이 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피라미드 제일 아래 단계의 욕구가 아니다. 그들은 끊임없이 사고를 하기도 한다.

 의식주에 해당하는 욕구를 채우기 위해 살아가는 것은 당연하다. 누구나 안정적인 삶을 원하기 때문이다. 그 삶을 위해 많은 것을 희생하면서 또 다른 욕구가 나타난다고 보일 수 있다. 그리고 인간은 그것에 따른 관계를 맺는다. 관계의 형태를 맺는다는 것은 자발적일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자신의 의사에 반하지만 관계를 맺음으로써 하나의 형태로 존재하게 된다. 관계의 형태로 존재함으로써 발생하는 처세술과 함께 인간은 존재할 수 있다. 보편적인 이야기이다.

 하나의 문제가 생긴다. 이 관계의 포함은 자신이 인지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을 수 있고 알면서도 그 관계의 형태에 속해, 주도적으로 나아갈 수도 있다. 여기에는 필연적으로 상대적인 기준의 선과 악이 존재한다. 인간 한 명 한 명의 기준을 다 채울 수는 없다. 

 관계의 형태에는 장(長), 흔히 리더가 있어야 한다. 리더란 관계에서 그 무리의 방향성을 가진다. 선과 악의 개념은 종종 이때에 나타나게 된다. 예전 교양 수업시간 플라톤의 네 대화편을 읽어본 적이 있다. 수업을 들어야 억지로라도 찾아 읽을 수 있었다. 내용을 이해할 수는 없었고 지금은 기억도 나지 않는다. 한 구절이 기억날 뿐이다. 소크라테스의 말인데 사람은 자신이 가진 무지의 무지도 모른다고 했다. 지금에서야 이 구절이 말하는 바를 조금은 알 것 같다. 만약 관계의 방향성을 가지는 리더가 무지하다면 그 리더는 무능하다고 생각해도 될 거 같다. 만약 리더 스스로 자신의 말이나 행동을 인지하고 그 관계의 방향성을 주도해 나아간다면, 또 그 관계에 포함한 인지 하거나 인지하지 못한 자들의 동의 또는 동요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 것인가. 선과 악의 개념은 이때 나타난다.

 

 시대가 바뀌면서 새로운 세대가 나타나고 그만큼 개방적이고 자유로운 만큼 각자의 주장은 더욱 뚜렷해진다. 하지만 옛말이 틀린 것은 없다. 오래된 관념이기 때문일 수도 있고, 아니면 인간이 가진 마음의 무게 때문일 수도 있다. 스스로를 속이면서 산다는 것은 얼마나 괴로운 일인가. 인간은 마음의 무게, 즉 양심이 존재한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부끄러움이 점점 무뎌진다고 생각 든다. 부끄러움을 부끄럽다고 느끼지도 못하는 마음을 인지하는 순간 그것은 멘탈이 강해졌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스스로의 양심에 하나의 괴물이 되었다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인간 각자의 욕구로써 관계를 맺고 살아갈 때, 인간은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일까 하는 물음을 가진다. 선과 악의 상대적인 개념에 스스로 견딜 수 있는 부분은 어디까지 일까? 에고의 확대라는 말이 있다. 균형을 잡아야 하지만, 그 균형을 무너뜨리거나 무너지는 순간 가차 없이 램프에서 빨간 불이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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