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대로 끼어 보지도 못한 반지
S군의 할아버지는 저녁이 되어서야 이부자리에
누웠다. 하루 종일 움직였던 터라 온몸이 쑤신다.
다시 일어나 쑤시는 허리를 손으로 두드리고 있는데
설거지까지 마치고 정리를 끝낸 아내가 들어온다.
얼굴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묻는다.
"오늘 무슨 언짢은 일이라도 있었나..? "
조심히 묻자 별일 아니라며 괜찮으니 맘 쓰지
말라고 한다.
재차 물으니 털어놓은 속내는 이러하다.
마을에 애경사가 있으면 품앗이처럼 모여 일을
도와주는 풍습대로 혼인하는 집에 다들 모였다.
사람 여럿이 모이면 그중에는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은 꼭 있기 마련이어서, 이번에도 전 부치며
혼수가 어떻고 또 패물을 무얼 받았고 그래서
시댁에 뭘 해줬고 이러고저러고 말을 했다.
그러자 옆에 사람이 이 집도 형편도 안 좋은데
꼭 그렇게 무리해서 딸을 시집보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 둘이서 정화수 떠 놓고 혼인해도
두 내외가 정만 좋으면 잘 살더라고 말하니
그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이 또 말을 하길
이렇게 혼례식을 제대로 하고, 또 서로 반지를
주고받아 손가락에 끼어야 제대로 된 혼인이고
그래야 죽어서도 그 집안사람으로 받아들여져
대접을 받고, 그렇지 않으면 영혼이 갈데 없이
구천을 떠돈다고 했다는 것이다.
여기까지 듣고는 더 이상 말 안 해도 아내가
어떤 맘이었을지 다 알 수 있었다.
그 시대에는 거의 그렇듯, 서로의 집안도 어려웠고
또 장남도 아니었기에 진짜로 둘이서 정화수 떠놓고
조촐하게 혼인을 올렸으니, 금 가락지 은가락지는커녕 가락지 하나 없이 서로 술 한잔씩 나눠마시고
초야를 치렀다. 대부분 그렇게 했고 그것이
흉될 상황은 아니었다. 그랬는데 그 말을 듣고 보니
나중에 죽어서 이 집안에서 받아주지 않으면
정말로 자신의 영혼이 구천을 떠돌게 될까 걱정했던
것이리라.
" 그거 다 쓸데없는 말인 거 알잖아.
별 걱정을... 당신은 누가 뭐래도 떡 두꺼비 같은
아들 낳아 키운 우리 집안 며느리가 맞고 그건
조상님도 인정하실 테고, 죽어서도 변함없는 일이지.
그리고 형편이 나아지면 내가 꼭 닷돈 짜리
금쌍가락지 해서 그 여편네 보란 듯이 이 손가락에
끼워줄 테니 조금만 기다려주시오."
어깨를 토닥이며 맘을 달래주다가 착한 아내가
말도 못 하고 혼자 맘이 아팠을 것을 생각하니
명치가 저릿하다. 속으로 다짐을 한다.
꼭 열심히 일해서 일가를 일으키고, 약속한 반지도
꼭 해서 끼워주겠다고.
짐작하겠지만 그 누구보다 열심히 일하신 S군의
할아버지는 한 뙈기씩 땅을 사 모아서 얼마 후엔
지역 특산물이었던 조그마한 복숭아 과수원을
갖게 되었다.
첫 수확을 내다 팔던 날, 할아버지는 맨 먼저
읍내에서 제일 잘한다는 금방에 가서
금 닷돈으로 쌍가락지를 만들어
아내 생일에 손가락에 끼워줬다. 약속을 지킨 것이다.
아내는 기뻐하며 반지 낀 손가락을 바라보고
쓰다듬고 하다가, 다시 상자에 담아 이불 깊숙한
곳에 넣어뒀다. 아끼지 말고 남들 보란 듯이 끼고
다니라는 남편의 성화에도, 그 귀한 반지를
끼고 일하다 닳으면 아까워 어쩌냐며, 끼고 있지
않아도 마냥 든든하고 좋다며 웃곤 했다.
계속 조금씩 땅을 사 모으고, 복숭아나무도
자꾸 늘려가니 이제 그 고을에서 제일가는 부자는
아니어도 남 부럽지 않게 살림을 꾸려갈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모든 일이 그렇듯, 없는 살림에 시집와서
매일 해질 때까지 일하고 아이들 키워내느라고
고생한 아내, 즉 S군의 할머니가 이제 좀 살만하니
먼저 이 세상을 떠나셨다.
황망하게 아내를 보내고, 아내의 유품을 정리하다
이불장 깊숙한 곳에서 손수건에 곱게 싸고
또 싼 쌍가락지를 보고 할아버지는 소리도 내지
못하고 한동안을 울고 또 울었다. 아끼느라 제대로
끼어 보지도 못하고 떠난 아내가 너무도 안쓰러웠다
경황없이 장례를 치르고서야 발견했기에 그 또한
속상했다. 미리 알았으면 , 미리 생각했더라면
이 반지를 손가락에 끼워서 저승길에 보냈을 것을.
가슴이 아프다는 것이 이런 것이었구나...
가슴이 찢어진다는 게 이런 것이구나...
미어지고 아팠다.
아내를 잃고 상처가 깊었을까..?
허전하고 그리운 마음이 컸을까..?
할아버지도 그 뒤로 3년을 못 채우고
아내를 따라 이 세상을 떠나셨다.
" 그래서요..? "
잠시 숨을 돌리고 차 한 모금을 마시며
바람에 흔들리는 풍경을 바라보고 계신 스님.
내가 궁금한 마음에 참지 못하고 스님을 채근한다.
" 그래서 어떻게 되었는데요..? "
도시에 나가 직장에 다니는 큰 아들 대신 둘째
아들인 S군의 부모가 홀로 된 할아버지를 모시고
살았었다. 그러다 할아버지 마저 돌아가시고는
조상님들 제사를 착실히 지내주기로 하고
맏이 대신 복숭아 과수원도 물려받게 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살아가며 아들 둘에 딸하나를
키웠는데 S군이 맏아들이었던 것이다.
어려서부터 똑똑하고 공부도 잘하여 기대가
컸는데 판 검사까지 될 재목은 아니다 싶어
회계사에 뜻을 두고 공부를 열심히 했다고 한다.
그런데 모의고사를 보면 합격선 안에 들만큼 점수
도 좋고 한데, 막상 시험만 보면 떨어지고.. 하길
벌써 10번째 되었을 때,
한 해, 한 해 묵묵히 뒷바라지하다가 10년이라는
세월이 지나버리자 이제는 지치기도 하고 답답했던
S군의 엄마가 용하다는 점집마다 다 찾아
돌아다녔다고 한다.
비싼 부적도 써 보고, 굿도 해 보고 하라는 대로
하지만 다 소용없이 13번째 불합격. 이제 지쳐서
포기하려는데, 기가 막히게 영험하고 착한
바보스님이 있다는 소문을 들은 것이다. 게다가
돈도 안 받고 기도해 준다니... 믿을 수가 없었지만
속는 셈 치고 가 보자. 하고
소원암에 찾아왔던 것이다.
S군의 엄마가 소원암을 찾아온 날.
신당에선 또 회의가 열렸다.
명도 동자가 '회의 중' 팻말을 신당 문 밖에
걸어 놓고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