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거야 피장파장 아니겠니…
요한이 자신을 보기 싫었을 텐데 와주셔서 감사하다 말했을 때, 정여사는 그의 얼굴에 서린 젊은 요한모의 환영을 떨치려 눈을 감고 빠르게 고개를 젓고 난 뒤 겨우 대답했다.
용서해주세요. 잘못했습니다.
요한이 바닥에 무릎을 꿇으며 말하자 정여사는 화들짝 놀랐다.
얘, 이게 무슨… 뭐해, 얼른 일으키지 않고!
정여사는 친아들을 다그쳤다. 진원의 손에 이끌려 일어난 요한은 여전히 죄인처럼 서있었다.
그 일은… 네 아버지가 그러시더라. 당사자가 용서한 일을 어쩌겠느냐고. 내가 무슨 힘이 있니.
어머니.
진원이 목소리를 높이자 정여사는 헛기침을 했다. 그런데 요한은 미소했다. 그 옛날에도 제대로 사과한 적 없던 그이였으니 놀라울 것도 없었다. 요한은 세월이 흘렀어도 여전히 자존심 센 그녀가 차라리 반가웠다.
그 일 말고도… 제가 진작에 찾아뵙고…
얘, 지난 얘긴 그만두자. 나도 잘한 거 없잖니.
네에… 제게 왜 그러셨어요. 제 손 좀 잡아주시지, 그저 값싼 동정이라도 한 번만 안아주시지… 요한은 소리내어 말하지는 못한 채 그저 쓰게 웃었다. 그렇게 대들어볼 기운도 지금은 없었다. 이 자리에 나온 것도 허수아비처럼 진원에게 이끌리고 태수에게 등 떠밀려서였다. 그런데 정여사를 보자 저절로 공손히 인사하고 죄까지 청했던 것이다.
얘, 너 아직도 고길 잘 안 먹니? 아무리 상중이라지만 한창나이에 얼굴이 그게 뭐니, 속상해서 정말.
정여사가 대뜸 혀를 차며 말하자 요한은 다시 미소했다. 김원장처럼 밥상머리에서 고기를 집어 밥숟가락 위에 얹어주지는 않았어도 영양가 높은 반찬그릇들을 슬쩍 그 앞에 밀어주곤 했던 그녀 모습이 떠올라서였다. 그래놓고 정작 자신과는 눈도 잘 마주치지 않고 새초롬하기만 했었다. 그런 기억마저 없었다면 아무리 넋이 반쯤 나가있는 상태였더라도 요한은 이 자리에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정여사를 아무리 미워하고 원망하고 두려워했어도, 끝끝내 지울 수 없었던 또 하나의 장면이 그를 이곳으로 이끌었다.
그리하여 요한은 그날의 기억을 말했고 정여사도 바로 알아듣고는 고고한 자태를 무너뜨리고 말았던 것이다. 이 아름다운 청년을 ‘우리집 아이’이자 ‘내 아들’이라 불렀던 그때로 돌아가서, 정여사는 값비싸게 관리받은 두 손에 얼굴을 묻고 한참을 소리내어 울었다. 그리고 요한은 어려서는 내지 못했던 용기를 내어, 양어머니에게 다가가 그녀의 어깨를 안고 눈물을 흘리며 어머니를 기도하듯 되뇐 것이다.
겨우 울음을 멈춘 정여사에게 요한이 물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어머니 그렇다면… 제게 미안하시면, 엄마…
엄마, 란 말에 정여사와 그녀의 아들과 희영이 요한에 주목했다.
돌아가신 엄마 얘길 해주세요. 아무래도 아버지보단 어머니가 더 많이 보셨겠죠? 엄마 얘기를… 들려주세요.
눈물을 마저 닦으며 정여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시은에게 들려줬었던 이야기를 해주었다. 너무도 청초하게 아름다워 같은 여자로서 질투가 났다는 속내까지 솔직히 털어놓으며.
******
아무래도 우리 아버지란 남자가 사랑한, 그나마 사랑했다고 말할 수 있는 여자는 네 엄마뿐이었던 거 같다.
이야기를 마친 정여사가 일어서자 그 아들은 모친을 배웅하러 가고, 요한과 둘이서만 빈소로 돌아가는 길에 희영이 나지막이 말했다. 요한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네 엄마는… 우리 엄만, 생각해보면 그래도 미운 정이라도 있었던 것 같은데 그분은…
희영이 깊이 숨을 내쉬었다. 요한은 그저 입을 다물고만 있었다.
생모의 자취를 마침내 찾아낸 연주모는 고인의 전남편이 선뜻 제공한 사진들과 영상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설명한 바 있었다. 정작 요한은 기억도 못하는 사진들과 영상들을 그 부친은 옛 모습 그대로 보관하고 있었던 것은 물론이고 특히 모자의, 특히 요한모의 몇 안되는 독사진만큼은 휴대전화의 카메라로 다시 찍어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 이야기를 전하며 연주모도 희영과 비슷한 말을 했었다. 요한은 그때 화를 냈다. 누가 사랑을 그딴 식으로 해요?! 우리 엄만 매일같이 울기만 했는데! 그런데 연주모의 추측을 증명이라도 하듯 생부는 다시는 병상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가버렸지 않은가. 그의 남겨진 아내는 울지도 않았다. 그녀의 관심은 오로지 유산과 친자 두 명의 앞날뿐인 것 같았다. 아무리 뿌린 대로 거두는 법이라고는 해도 고인의 말년은 퍽 비참했다.
우리 엄마 같으면 군말 없이 병수발 잘 들었을 거 같으니까 그랬겠지. 그렇게 자기밖엔 모르는 인간이 사랑은 무슨…! 요한은 연주모와 희영, 두 사람의 말에 동조하지 않았다. 그런데 한 명이 더해져 결국 범을 만들어냈다. 그의 계모가 호랑이를 만든 세 번째 사람이었다.
망자를 매장하고 나서 돌아갈 채비를 할 때 요한의 새어미는 의붓아들에게 따로 보여줄 것이 있다고 했다. 정여사가 꼭 오라고 하여 마침내 진원과 자라난 고향집에 들를 생각에 사뭇 들떠있던 요한은 별생각 없이 목적지에서 가까운, 친부가 살던 집에 방문했다. 요한이 십대 초반에 발길을 아예 끊고 난 뒤 내부를 크게 고쳤는지 기억 속의 모습은 거의 볼 수가 없었다. 물 한잔도 내어주지 않은 채 계모는 표정도 없이 고인의 서재로 앞장서더니, 육중한 책장 아랫부분에 놓인 묵직한 상자들 중 하나를 꺼내 전실자식에게 보여주었다.
그곳에는 예의 요한모자의 영상과 사진들은 물론이고 남겨진 옷가지와 사용하던 물품들이 가득했다. 특히 어린 요한도 들었을 라디오 수신 겸용 카세트테이프 재생기를 비롯해 요한보다는 그 어미의 것들로 보이는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요한이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몰라 어리둥절해하고 있는데
이것들이면 되겠지? 유산까지 꼭 챙겨야겠냐고.
계모의 본론이 나왔다.
네 아버지란 양반, 틈만 나면 이것들 들여다보고 만지작거렸다. 네 엄마도 남몰래 수소문하느라 한때 돈깨나 들였던 것도, 내가 모를 줄 알았겠지만 난 다 알았어. 네 큰고모는 내가 자식들밖에 모른다고 못마땅해했지만, 내가 괜히 야박하게 군 게 아니다.
계모는 냉랭하게 말했다.
이것들 내가 다 버려버리면 그뿐인 거 너도 알 거다. 의붓딸년이라는 게 갑자기 나타나서는 건방 떨며 협박할 땐 당장에 불질러버리고 싶었지. 그래도 너한텐 악감정 없고, 유산은… 그냥 네 몫만 받아가라. 네 누나는 네가 설득해. 확정되는 대로 물건은 넘겨주마. 하나가 아니고 여러 개니까 어차피 지금 당장엔 다 못 가져갈 거다.
여전히 담담한 얼굴로 차분히 말을 마친 계모는 어쩔 줄 몰라하는 요한을 쫓아내다시피 하여 집에서 내보냈다. 한마디도 못하고 내쳐진 요한은 대문 앞에서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오열했다.
한참 후에야 예전에 쓰던 방이 남아있는 집으로 겨우 돌아간 요한은 그날부터 내리 사흘을 앓았다.
연차를 더 내기 곤란했던 진원과 가게를 열어야 하는 태수는 상경했으나, 희영은 이틀을 더 휴강하고 정여사의 초대로 남편과 아이까지 함께 머물며 정여사 부부와 함께 요한을 돌보았다. 귀국해서도 모친과 외조부, 나중에는 외조모까지 잠든 추모공원에 가는 것 빼고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던 고향에 거진 삼십 년 만에 돌아온 희영은 짬을 내어 태어난 곳을 돌아보며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남편과 아이 덕택에 눈물은 금세 그치고, 그저 즐거운 관광객인 것처럼 웃으며 구경을 할 수 있었다.
자리보전한 지 사흘째에 기력을 회복한 요한은 이복누이에게 계모와의 일을 조심스레 전했다. 희영은 입을 굳게 다물고 듣기만 하더니 곧 씩 웃으며
그 아줌마 인심도 많이 썼네. 다만 원래의 네 몫은, 혹시라도 괜히 미안한 마음에 포기하진 마.
요한의 마음을 알아챈 듯 말했다.
죄송해요… 저 신경 써서 그렇게까지 해주셨는데.
요한이 고개를 떨구며 중얼거렸다.
괜찮아. 받기는 싫은데 그 여자한테 주기도 싫어서 그런 것뿐이야. 너한테 넘긴다고 했으니 이젠 네 맘이지.
희영이 씩씩하게 말하자 요한은 물끄러미 그녀를 보았다.
나야 그 돌아가신 양반에 대한 마음 달라질 거 없는데 넌 좀… 달라졌겠다? 좀 용서가 되니?
아니요.
요한이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하자 희영은 옅게 웃었다.
…내가 성급했구나. 그래 정상참작? 정도?
아니요.
더 단호해진 대답에 희영은 당황했다.
그게 뭐예요. 딸같이 어린 여자 반강제로 아이 만들더니 여자가 맘 잡고 살지도 못하게 하고, 그래서 바람난 여자 내쫓았으면 다 잊고 살 일이지 뭘 그렇게 바리바리 싸둔 채로… 찾기는 또 왜 찾았대요?
요한이 씩씩거렸다.
그럴 거면 왜 그렇게 울게만 만들고, 또 다른 여자가 아이 갖게 만들고, 기다렸다는 듯 뒤도 안 돌아보고 내쫓았냐고… 앞뒤가 안 맞잖아. 그냥, 시작부터, 처음부터 잘못된 인연이었어요. 그러니까 끝나서도 잘못된 채로 남았을 뿐이에요. 사랑은 무슨.
요한이 흥분하여 지껄이자 희영이 조용히 미소 지으며 말했다.
내 앞이라고 괜히 그럴 거 없어. 우리 엄마도 아버질 사랑했다고 보긴 어렵잖니. 이모 말씀처럼, 그래도 부부인데 그렇게 떨어져 살면 안되는 거지, 내가 뭐 엄청난 천재여서 초청을 받아 간 것도 아닌데. 뒤틀리고 비뚤어진, 네 말처럼 잘못된 건 맞지만 그래도 사랑이 아닌 건 아니야. …뒤늦게, 너무 늦게 알았겠지. 후회하고 미안해하고 그런 거겠지.
아니, 아니라니까요!
격한 요한의 반응에 희영은 움찔 놀랐다. 요한의 눈가는 어느새 붉어져있었고 흥분이 지나쳐 몸까지 부르르 떨렸다.
그게 사랑이면, 안돼요. 안된다구요…
요한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희영은 그의 속을 알 수가 없었다. 적어도 자신에게 송구스러워서 그런 것 같지는 않다는 것만 짐작했을 뿐이다.
연이어 부정했지만 요한 역시 희영이 말한 것처럼 생각했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희영의 말처럼 용서까지는 아니어도 아버지란 사람이 처음으로 가엾게 느껴졌다. 그럴 줄 알았다면 누나가 면담했을 즈음 나도 만나러 갈걸. 엄마 얘길 물어볼걸. 엄마 물건이라도 미리 넘겨받을걸. 그런 생각들로 눈물이 났었다. 그런데 옛집에 돌아가 진원의 얼굴을 접하니 시은이 떠올랐고 그 둘에게 자신이 저지른 일들이 자동재생되며 요한은 생각도 못한 충격을 받았다.
그동안 자신이 아비란 사람을 닮은 구석이라곤 없다고 생각했었다. 외모도 손발이나 닮았을까 싶었고 절반의 확률이라는 병도 물려받지 않았으며, 소심한 성격마저 엄마와 똑같지 않았던가. 굳이 아비를 닮은 것을 찾자면 사내로서 색을 탐하는 것뿐이라고 생각했었다. 다만 무려 세 번이나 결혼하고 매번 자식들을 낳은 아비와는 달리 결혼도 자식도 욕심내지 않았으며, 피임에 철저했다. 여자들의 달콤한 꼬임에도 단 한 번도 넘어간 적 없는 것에 대해 요한은 자부심마저 느꼈다.
그러다가 처음으로 사랑에 빠졌다. 진원에 대한 마음이 지나쳐 집착 비슷해진 탓이기도 했다. 잘못된 사랑이었고 그래서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정리수순에 다다랐다. 그런데 사랑이란 것을 모를 것만 같던 부친 역시 똑같이 사랑을, 그것도 자신처럼 잘못된 사랑을 했다지 않은가. 무엇보다 한 여자를 포기하고도 포기 못한 아비의 과거가 자신의 미래가 될까 봐 요한은 두려워졌다. 그래서 누적된 스트레스의 마지막 낙엽 꼴이 되어 몸에 탈이 난 것이다.
나… 어떡해요? 아버지처럼 그러면… 겨우 정신차렸는데.
요한이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무슨 말이야?
…진원이 곧 결혼하는데 내가…
그래, 얘기 들었어. 그 일은… 정리된 걸로 들었는데.
네… 근데 나도 아버지처럼… 포기 못하고 계속 집착하면… 그럼 어떡해요… 차라리 누나처럼 몸이 아픈 게 낫지, 마음이 아프면… 우리 엄마… 엄마도 제정신이 아니었다는데 그러면 나는…
요한이 어린애처럼 울며 자신에 대한 배려마저 잊고 말하자 희영은 마침내 그의 걱정을 알아차렸다. 그녀는 겁에 질려 몸을 떠는 아우의 옆에 앉아 그의 어깨를 토닥이며 그동안 생각해왔던 제안을 불쑥 꺼냈다.
너, 나랑 같이 나가자. 뉴욕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