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영의 제안에 대해서, 그의 형제 같은 절친으로서의 진원은 요한에게 좋은 기회라 여겼으나 그의 연적으로서의 진원은 아직도 요한이 시은에 대한 마음을 정리하지 못한 탓일까 봐 신경이 쓰였다. 그리고 후자의 그 마음은 진원 자신의 염려가 투영된 결과였다.
굳이 꾸역꾸역 요한을 찾아간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들려온 소식을 듣고 시은은 자신이 고집 피워 했던 일을 몹시 자책했다. 그래서 진원이 같은 서울도 아닌데 굳이 조문가지 않아도 된다고 해보았지만, 부모를 한꺼번에 잃은 것과 마찬가지인 사람을 어떻게 모른 척하느냐고 시은은 화를 냈다. 그러더니 막상 상복을 입은 요한을 보고서는 말도 제대로 못하고 그저 울기만 했다. 미안해요… 또 만나게 만들어서. 오히려 요한이 붉은 눈가였지만 눈물 없이 담담히 말했다.
둘의 모습을 보고 진원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지난 여름 마치 폭풍우 같던 일들이 몰아치고 난 뒤의 첫 삼자대면이었다. 세 사람 모두 예상한 것보다 빠르게 이뤄진 만남이었다. 손가락 끝도 닿지 않은 채 그저 슬픔을 나누고 있을 뿐인 두 남녀의 모습을 보는 것이 진원은 힘겨웠다.
미안해요, 시은 씨.
진원과 시은이 나란히 앉은 음식상을 두고 마주앉은 요한은 그렇게 말했었다. 결혼을 앞둔 남녀는 무슨 뜻인지 알아들었다.
이제 식도 정말 얼마 안 남았는데 괜히 또… 미안해요. 미안해.
요한의 말에 진원은 연거푸 물만 마시고 시은은 눈물만 훔쳤다. 그렇게 세 남녀는 대화 없이 그저 앉아있었다. 아무도 차려진 음식엔 손 대지 않았다. 요한이 어색함을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려 할 때, 그들을 지켜보고 있던 희영이 냉큼 다가와 인사하며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그렇게 진원의 결혼식 이야기와 정여사의 말이 나오게 되었고, 요한의 편치 않은 사정을 두 눈으로 목도한 희영은 문득 요한을 데려가려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시은이 자책감과 요한의 기막힌 사정을 마음 아파하다 그나마 그의 이복누이와 사이좋아 보이는 것에 안도하고 있을 때, 진원은 그녀와 비슷한 마음이었지만 똑같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셋이 함께 만나 요한과 시은을 동시에 보는 게 지난 일이 있고 나서 처음인데, 확실히 그 둘 사이에 있던 일을 알기 전과 같을 순 없었던 것이다. 그는 속 좁은 스스로에게 실망했다. 그래서 더욱 요한의 상주노릇을 열심히 도왔고, 그를 대신할 수 있는 일이면 무엇이든 하려 들었다. 그런데도 거의 사라졌다고 생각했던 요한에 대한 마음의 벽은 존재감이 뚜렷했다.
그런 와중에 희영의 제안을 전해듣고 그 기쁨이 요한보다 자기자신을 위한 것임을 알아채고 또다시 자신에게 실망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 감정을 마냥 숨기지 않고 시은에게는 장례 직후 바로 터놓았다는 점이었다.
그럴 수 있어… 나라도 그랬을 거 같아. 자기가 느끼지 말았어야 할 감정을 느끼게 만들어서 미안해. 그래도 그 사람한테는 그 마음 들키지 마. 이미 우리에게 충분히 미안해하고 있는데 거기에서 더…
알아. 당연히 말할 생각이야 없지만 혹시라도 녀석이 눈치챌까 봐 걱정이야. 결혼식… 녀석이 안 오겠다고 해준 게 다행스러운 거 알아? 어머니랑 화해까지 한 마당에 번복될까 봐 마음 졸였어. 그리고 이런 내가… 녀석에 대한 내 마음이 이토록이나 얄팍했던가 싶어 내가 너무 싫다.
시은이 진원의 손등을 토닥였다.
솔직하게 말해줘서 고마워. 요한 씨가 떠나면 그곳엔 누나와 조카가 있고, 남으면 이곳엔 이젠 어머님이 계시잖아. 전처럼 자기랑 사장님밖에 없는 그런 상태가 아니잖아. 그러니 어느 쪽이든 괜찮을 거야. 그리고 우리 사이엔 더는 자기가 걱정할 일 없을 거야. 그러니 조금만 더 용기를 내줘.
그제야 진원이 미소 지으며 시은을 안았다.
응, 고마워. 자기 말대로 조금 더… 품이 큰 내가 되도록 노력할게. 약속해.
진원은 시은의 격려를 통해 안정감과 자신감을 되찾고 요한에 대해서도 초심을 되찾으려 애썼다.
한편 태수는 요한의 선택지에 대해 뜻밖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며칠을 그 건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더니, 마침내 가라. 가서 있을 만큼 있어. 명령했다. 진원에게는 또다른 마음의 짐이 될까 봐 차마 말할 수 없던 걱정을 요한은 태수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그 염려를 들으면 태수는 당장이라도 떠나라고 말할 것이 뻔했고, 떠나는 데 마음에 가장 걸리는 사람이 바로 그였기 때문이었다. 누이의 제안을 받은 것만으로도 요한은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지만, 태수를 혼자 두고서는 짧은 관광 일정이면 몰라도 그가 말하는 대로 있고 싶은 만큼 실컷 있을 수는 없었다.
가게는 어떡하구요. 나 사고 치고 다니는 동안 손해가 얼만데 어떻게 또 그래요.
나 없인 못 살겠다면서요, 장난스레 말해보고도 싶었으나 태수가 얼굴을 붉히며 그땐 너무 놀라서 그런 거지! 손사래칠 것이 뻔했으므로 요한은 그저 사실만을 말했다.
정 안되겠으면 접으면 그만이지.
태수는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널 그냥 직원으로만 생각했으면 붙잡겠지만, 친동생처럼 여긴다고 해놓고 어떻게 잡겠냐. 난 교수님처럼 잘나지 못해서 해줄 수 있는 게 이것뿐이다.
태수는 그동안 요한의 몫으로 모아온 돈으로 발행한 수표를 내밀며, 안 받으면 이제 너 유산도 받는데 너무 적어서 성에 안 차서 그런 거라고 생각할 거다, 심통스럽게 말했다. 요한은 새삼 그의 마음씀에 감동받고 놀라서, 아니 형! 다 떠나서 형을 어떻게 혼자 내버려둬요. 형한테 나밖에 없는 걸 내가 아는데 내가 어떻게 그래요. 얼떨결에 속마음을 터놓고 말았다.
태수는 다시금 요한에게서 고개를 돌리더니 들릴락 말락 한 소리로 괜찮아. 혼자 아니야. 라고 말했다.
알고 보니 그동안 태수는 요한의 사건사고를 겪으며 망둥어처럼 날뛰던 연주 때문에 얽히는 일이 잦았던 지수와 핑크빛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그것도 지수의 주도로 시작된 연애였고, 둘 다 나이가 차고 넘친 탓에 연주모녀의 응원을 받으며 결혼 얘기까지 오가고 있는 중이었다. 괜히 태수가 요한과 함께 금주와 금연에 동참하고, 요한부 장례가 끝나자마자 다시 술담배를 멀리하는 게 아니었다.
태수는 요한이 괴로움과 절망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방황하는 동안 엉뚱하게 시작된 뒤늦은 애정전선이 낯부끄럽고 미안해서 요한을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그의 미국행 이야기가 오가지 않았다면 아마도 앞으로도 한참 동안, 더 이상 숨길 수 없게 될 때까지 태수는 기를 쓰고 감추었을 것이다.
…면목없다. 너는 그러고 있는데…
태수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으나 요한은 그를 얼싸안았다.
혀엉! 내가 얼마나 기쁜지 알아요? 정말, 정말 잘됐어요!
이거 놔라…
말과는 달리 그는 발그레한 얼굴로 요한에게 안긴 채 가만히 있었다.
눈치 못 채서 내가 미안해요. 그리고 나보다 훨씬 더, 형수님이 기뻐하실 거니까… 아무 걱정 마요.
요한이 유독 많이 울던 지난 한가윗날 납골당에서의 태수를 떠올리며 위로하자 태수가 울먹이며 말했다.
정말… 괜찮겠지? 나 이제…
네, 행복해도 돼요. 지난 세월 것까지 이자쳐서… 행복해져요, 형.
요한은 그가 준 수표를 고이 간직했다가 그가 결혼할 때 돌려줄 것을 생각하며 태수의 널찍한 등을 토닥였다. 그리고 내가 떠날 때가 됐나 보다, 생각했다.
요한이 말하지 못한 속사정이 아니더라도, 생모마저 한 줌 재로 돌아온 마당에 생부의 병사는 차치하고라도 그가 굳이 이 땅을 고집할 이유는 태수가 생각하기에도 없었다. 더구나 그나마 혈육이라고 기대어봄직한 든든한 이복누이와 함께 지낼 수 있는 곳이지 않은가. 태수는 자신이 요한이라면 주저 없이 보따리를 쌌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마음을 접었다고는 해도 어쨌거나 한동안은 진원을 대하기 편치 않을 것이고 시은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럼에도 요한은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계속 망설였다.
장례 직후 십 년 만에 옛 침대에 누워 지내는 동안 정여사가 칼에 손을 베어가며 갖은 야채와 소고기를 듬뿍 넣은 나머지 색색의 알갱이가 너무 많게 끓여진 죽을 가져다주며 환자가 그릇을 다 비울 때까지 방을 떠나지 않았을 때, 요한은 비로소 그녀를 완전히 용서했다. 여전히 머리 한 번 쓰다듬어주지 않았어도 상관없었다. 진원에게도 다 큰 아들자식이라 다르지 않게 대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어서였다. 정여사는 주뼛거리며 이젠 자주 내려오라고, 오는 겨울에는 하랑까지 네 가족이 비행기를 타보자고까지 말했다. 그 말대로 하고 싶었다. 진원의 몫까지 김원장 부부를 챙겨주고 챙김받고 싶어서였다.
그런데 정작 요한이 마침내 거취를 결정한 것은 김원장 때문이었다. 정확히는 그의 말 때문이었다.
요한의 결혼식 불참석을 전해들은 김원장은 진원을 나무랐다.
네가 불편해도 요한인 우리 가족으로서 참석하는 게 맞다.
어째서요, 아버지?
진원이 다소 불만스럽게 되묻자 김원장은 단호하게 말했다.
그래야 서로에게 확실해질 거다. 너희들의 현실 말이야. 너와 시은인 결혼하고 요한인 네 형제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 말이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지 않든.
…아버지가 그렇게 나오시면 저나 요한이나 어떻게 거절하겠어요.
진원이 허탈하게 웃었으나 김원장은 진지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내가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이유를 말해주마.
무슨 다른 이유가 있습니까?
그애가 일방적인 마음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네게 미안해하고 그렇게 괴로워하면서도 좀처럼 포기 못한 마음이었기 때문이야… 시은이도 같은 마음이었다면 어쩌면 난 그 둘을 응원했을지도 모르겠다. 네 아버지로서는 네게 미안하다만, 요한이 아버지로서의 나는 그애가 가엾기 그지없구나.
김원장이 씁쓸한 얼굴로 말했으나 진원은 오히려 미소했다.
예에, 아버지 아들로서의 저는 섭섭하네요. 하지만 그 녀석의 쌍둥이 같은 친구로서, 또 한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로서는, 아버지 말씀처럼… 그랬다면 저도 어쩌면 포기하고 물러났을지도, 아니 제 마음이 부서지더라도 그래야 했겠죠. 그런 말은 시은이한테도 했었습니다. 그런데 시은이가 저와 헤어지더라도 요한이에게 가는 일은 절대 없을 거라고 했기 때문에… 그 뒤로도 제게 지속적인 확신을 주었기 때문에 여기까지 온 겁니다.
그래. 너도 아는 일이겠지만, 앞으로 살아가면서 이 일로는 다시는 네 아내 될 사람을 의심해서는 안된다. 그건 시은이에게도 못할 짓이거니와 너 자신에게도 형벌이 될 거니까.
예, 그럴 각오가 없었다면 저희 둘 다 여기까지 오지 않았습니다. 걱정 마세요.
그애에겐 내가 따로 얘기하마. 그러니 결혼식 때까지 넌 확실히 마음 다잡아둬야 한다.
진원은 시은에 이어 부친에게서도 옹졸한 속내를 지적받은 것 같아 다시금 반성했다. 결혼을 해야 비로소 어른이 된다는 옛말을 떠올리며 진원은 이렇게 요란스럽게 그래야 할까 헛헛하게 웃었다.
김원장이 찾아와 설득하자 요한 역시 그의 말에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저지른 일에도 불구하고 김원장이 무려 가족석에 함께 있어줄 것을 부탁해오는데 감사히 여기지는 못할지언정 거절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장례식장에서 시은과 함께 있을 때 불편한 마음을 감추려 애쓰던 진원을 요한은 알아채고 그에게 미안함이 더해졌었다. 그의 여자를, 자신의 미친 짓 때문에 괴로움으로 눈물 흘렸을 시은을, 팔자가 더러운 자신에 대한 애도로써 또다시 울게 만든 것도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정여사와의 화해에도 불구하고 결혼식 참석 여부를 번복하지 않았던 것인데, 김원장이 나서는 데야 도리가 없었다.
그리고 이렇게 된 바에야 얼마가 될지 모르지만 누이를 따라 나갔다 오는 것이 옳을 일이었다. 무엇보다 진원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고 싶었다. 그것만이 그가 가장 사랑하는 이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었다.
요한은 자신의 결정에 만족했다. 처음 느끼는 해방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