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결혼식장에서

by 지구인



11월 첫째주 토요일 이른 오후였다.


흐렸던 전날과 달리 20도 이상의 포근한 낮기온을 기록하며 날씨는 맑고 화창했다. 다음날에는 비 예보가 있었으므로 택일이 잘됐다고 할 만했다. 서울 강남에 위치한 한 결혼식장에서 예식의 시작을 기다리고 있던 예비부부에게는 특히 그러했다.


양가 모두 개혼인 데다 예식의 주인공들이 시속을 따지면 제법 이른 나이였던 까닭에 식장은 꽤나 북적였다.


시종일관 온화한 미소를 띠고 손님을 맞이하는 양가의 아버지들과 달리 양가 어머니들은 서로 표정이 달랐다. 신부 어머니는 그야말로 입이 귀에 걸린 반면 신랑 어머니는 오랜 사교생활로 단련한 점잖으나 다소 가식적인 웃음만 지을 뿐이었다. 그래도 신부대기실에서 안사돈과 셋이서 사진을 찍을 때는 제법 활짝 웃어 신부의 모친을 안심시켰다. 기실 사진에 조금이라도 잘 나오기 위한 목적이 더 컸긴 했지만 말이다.


같은 옷을 입고 같은 미용실에서 꾸밈을 받은 탓이었을까. 예상을 뛰어넘는 사부인의 고운 자태에 정여사는 약간 당황했었다. 덮어놓고 알아서 해주세요, 와 좋아요, 만 연발하며 해주는 대로 가만히 있던 한여사와 달리 수시로 점검하며 까다롭게 굴었음에도, 아니 그것이 패착이었던지 정여사는 그 결과물이 사부인과 비교될까 봐 신경이 쓰였다. 예상 못했던 일이라 그이는 위기의식마저 느꼈다.


마치 그를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교회의 여신도들은 신부가 친정엄말 닮아 예뻤네요~ 웃으며 축하의 말을 건네왔다. 그들에게 시은을 교회에 불러 인사시킬 때 화장을 따로 받고 오라고 시켰던 일까지 겹쳐져 엉뚱한 결과를 만들어낸 현실에 정여사는 잠시 약이 올랐다. 그러나 애써 마음을 다스리고 외아들의 인륜지대사를 최우선순위로 삼는 모성을 발휘하는 데 성공했다.


요한은 하랑과 함께 일찌감치 가족석에 나란히 앉아있었다. 환절기의 노인인 양 얇은 살구색의 마스크를 낀 그의 머리칼은 군인보다도 짧게, 차라리 불승에 가깝게 바짝 깎여있는 채였다.


묻지도 않았는데 하랑은 소개팅한 남자 하나와 썸을 타고 있다며 작은오빠를 안심시켰다.


그 남자와의 첫 만남 때 차 한잔만 겨우 마시고 도망치듯 요한의 병문안을 갔던 일을 하랑은 말하지 않았다. 남자가 다시 연락해와 두 번째로 만났을 때, 그가 수줍게 건넨 꽃다발을 받고는 주저앉아 펑펑 울어버렸던 일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요한이었으면 하는 마음이 남아있어서, 그 마음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알아서, 어쩔 줄 몰라하는 상대에게 그저 미안하다는 말밖에는 할 수가 없어서, 하랑은 울었다. 그 일을 앞으로도 말하지 못할 것을 너무 잘 알아서 하랑은 또 눈물이 났지만, 요한에게 줄 수 있는 마음은 여동생으로서의 그것뿐이라는 것을 머리까지 짧게 깎은 그와 함께 신랑 측 가족석에 앉게 되자 실감이 났다.


요한은 어린 누이를 격려해주려 했으나 곧 그녀의 친척들이 하나둘 인사를 해오며 그를 힐끗거리기 시작했으므로 슬쩍 일어나 구석으로 피했다. 그러다 기다리던 태수 커플과 연주모녀가 나타나자 그는 반가워하며 그들에게로 갔다.


정여사가 서울의 백화점에서 직접 골라 사 입힌 비싼 양복을 빼입고도 마스크도 벗지 못한 채 고개도 제대로 못 드는 요한이 딱해서, 덩치가 좋아 양복 입은 태가 잘 나지 않는 태수는 잠시 혀를 찼다. 그의 팔짱을 끼고 나타난 지수는 모처럼 고급스러워 보이는 원피스를 입고 안경을 벗은 얼굴에 화장까지 곱게 하며 숨겨둔 여성미를 뽐냈다. 그녀의 이모는 여느 때와 크게 다르지 않게 우아하게 잘 꾸민 차림이었다.


그리고 연주는 나이에 어울리는 분홍 미니원피스에 연하게 화장해서 눈부신 청춘임이 잘 드러났지만, 요한을 따라나가 어학연수라도 하고 오고 싶다고 방방 뛰다가 모친에게 크게 혼이 났던지라 조그만 입이 댓발은 나와있었다. 받고 싶었던 부케도 지수에게 빼앗기게 된 것도 심통이 났다. 그런 와중에 요한의 반삭한 머리를 보자 기가 막혔다.


오빠, 미쳤어? 그 예쁜 머리를 대체 왜!


서연주, 조용해라.


모친이 타이르자 연주는 목소리를 낮추어 툴툴거렸다.


뭐 그렇게 해도 잘 생겼지만, 난 전에 머리가 더 좋단 말야.


남자답고 보기만 좋은데 뭘. 잘했어요.


지수가 칭찬하자 연주는 언니 취향이야 아재니까 그렇지… 삐죽거리다가 모친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하기야 지수는 연인이 금연하고 술도 삼가게 만든 데 이어, 이날을 핑계 삼아서는 펌한 꽁지머리마저 없애게 만들었다. 턱수염마저 밀면 홀딱 벗고 다니는 것 같다고 태수가 펄쩍 뛰는 바람에 면도는 실패했다. 지수는 깔끔한 것을 좋아하는 만큼이나 전통적인 남성미를 선호했고, 태수의 산적과도 같은 생김새에 반했으므로 의견충돌은 오래가지도 않았다.


자신의 헤어스타일의 변화에 대해 오가는 평가를 요한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결혼하는 커플에게 조금의 분란거리도 주지 않는 것만이 그의 관심사였다.


그래서 태수들이 신랑과 인사한 뒤 신부대기실에 가서 사진까지 찍고 왔지만 요한은 그곳에 눈길도 주지 않았다. 태수가 자신에게 그랬듯 요한도 따로 적금까지 부어가며 모아온 거금을 신랑 측 축의금으로 내고, 마침내 그가 완성한 신랑신부의 다정한 모습이 담긴 그림이 스튜디오 촬영사진들과 함께 식장 입구에 전시되어있는 것으로 요한은 자신의 존재감의 한계선을 그었다.


사람들의 축하를 받고 사진을 찍느라 정신없던 시은은 신부입장 채비를 할 때에야 요한을 보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계속 앉아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치렁치렁한 웨딩드레스 속 제법 높은 굽의 웨딩슈즈를 새삼 실감했을 때, 발목을 걱정해주던 요한의 말이 떠올라서였다. 굳이 그를 찾아가 이성으로서의 마지막 만남을 고했던 것이 시은의 방식이었다면, 결혼식에 참석하면서도 시은에게 축하의 말 한마디도 없이 코빼기도 비추지 않는 것이 요한의 방식이었다. 그리고 김원장이 지적했던 대로 이것이 세 남녀가 직면한 현실이었다.


시은은 잠시 만약 요한을 마주했다면 그와의 지난 여름이 주마등처럼 스쳐갔을까 생각해보았지만, 이내 부친이 다가와


참 이쁘다 우리 딸…


물기 어린 목소리로 말하며 한 팔을 내주었으므로 그 부질없는 상상은 중단되었다. 어머니가 점화한 화촉 앞으로 아버지의 팔을 잡고 나아가,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는 신랑과 함께 나란히 서는 것이 신부의 당면한 과제였다. 시은은 환하게 웃으며 안사장의 팔을 붙잡았다.


너 결혼할 땐 이 자리에 나랑 지금 신랑신부가 앉아있겠구나.


희영의 말에 요한은 그녀를 보았다. 하객들이 넘친 탓에 희영은 남편과 아들과 함께 요한의 옆에 자리했다.


나도 결혼엔 관심 없었지만, 봐. 아이도 원한 적 없었지만 이젠 아이 없는 세상은 상상도 할 수 없어.


……


진부하지만, 뭐 그래. 원하는 대로 되는 일, 생각보다 많지 않지. 예상보다 나쁜 일도 많지만, 또 생각도 못한 선물 같은 일도 일어나는 게 인생인 거 같다. 너도 그렇게 생각해줬으면 좋겠어.


희영이 요한의 손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요한은 눈을 내리깔았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떤 희망을 품기엔 너무 많은 것들을 잃었고 그렇다고 절망만 하기엔 되찾은 것들과 새로 얻은 것들이 있었다. 평범한 연애나 결혼은 여전히 남의 이야기 같기만 했다. 누이처럼 아픈 마음과 몸을 보듬어줄 수 있는 자형과 같은 이를 만날 수 있는 행운은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건 아니리라. 요한은 그저 더는 주위사람들에게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을 뿐이었다. 현재로서는 그것 외에는 바라는 게 없었다. 그래서 나간 김에 랭귀지코스도 밟아보라는 희영의 조언에도 불구하고, 요한은 이역만리에서의 계획은 아무것도 생각지 않고 있었다.


요한의 미국행에 대해 이제 막 진정한 가족으로 거듭날 수 있는 물꼬를 튼 마당이라 정여사는 드러내놓고 아쉬워했고, 하랑과 김원장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화실의 민선생도 훌륭한 모델감을 놓쳤다며 허탈해하여, 요한은 작업 사이 짬을 내어 그녀 앞에 섰다. 그러나 그가 작가를 위해 벗어줄 수 있는 것은 상의뿐이었다. 그것도 용기를 많이 낸 것이었다. 그가 여성 앞에서 탈의한 것은 지난 늦은 봄 이후 처음이었다.


진원은 요한의 결혼식 참석과 출국에 대해 아무 말이 없었다. 장례식 이후로는 연락도 끊어졌다.


저번처럼 말도 없이 가게로 오는 것은 아닐까 하여 요한은 출입문에 기척이 있을 때마다 귀를 쫑긋 세웠지만 매번 허탕이었다. 그러다 결혼식 이틀 전 마침내 선물로 줄 그림을 완성한 그는 액자에 넣어 포장한 그것을 들고 진원의 아파트 현관문 앞에 놓고 돌아왔다. 축하의 메시지를 남길까 하다가 쑥스러워 그만두었는데, 그림에 대해서도 진원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하루를 꼬박 기다린 요한은 문득 화가 치밀어 진원에게 전화했다.


나도 가고 싶어 가는 거 아니야.


질러놓고 요한은 아차 했다. 결혼식, 이라고 꼭 짚었어야 했는데. 진원은 묵묵부답이었다.


…어떡하냐. 아버지가 그러시는데.


요한이 목소리를 낮춰 덧붙였으나 여전히 상대방은 답이 없었다. 요한도 말을 잃었다.


- 나 때문에 나가려는 거면 그만둬. 가더라도 금방 돌아와라.


잠시 후 진원이 조용히 말하자 요한은 눈물이 나려고 했다.


…너 때문 아니야. 나 때문이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요한이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


그림 제대로 받았나 아무 말 없길래 전화했어.


- 응. 받았다.


건조한 반응에 요한은 왈칵 서운함이 밀려왔다.


친구에 대한 깊은 미안함과 감사를 담아, 머리보다 더딘 마음을 달래어가며 솟는 눈물을 꾹꾹 눌러가며 어렵게 완성한 그림이었다. 양부의 말처럼 다시 절친이자 형제로만 남겠다는 선언이자 약속의 징표였다. 그런데도 진원은 뒤늦게 앙금이 남았는지 완벽한 타인처럼 차갑게 굴었다. 요한은 다시 눈물이 나려고 했다.


- 나 좀 바빠서. 식장에서 보자.


요한이 뭐라 할 새도 없이 진원은 전화를 끊었고 다시 연락해오지 않았다.


오히려 그림 때문에 화가 난 건가. 그걸 보니 내가 한 짓들이 떠올라서? 요한은 괜한 짓을 했나 후회하다가 예약해두었던 미용실에서 충동적으로 머리를 밀어버렸다. 시원했다. 속까지 후련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러고 출근했더니 태수는 깜짝 놀랐지만 별말은 하지 않았다. 단골 여자손님들이 무슨 일이냐고 물을 때 요한은 실연을 해서요, 웃으며 답했다. 그렇게 말하며 요한은 그 대상이 시은이 아닌 진원임을 깨달았다. 시은에 대한 마음이 정리되어가자 다시금 진원에 대한 갈망이 돌아오는 모양이었다. 요한은 나가기로 한 일이 그저 다행스러웠다.


그렇게 결혼식장에 걸음하여 당당히 놓인 그림을 보고 잠시 안도했다가, 자신의 짧은 머리를 보고도 왔냐는 말 한마디 말고는 본체만체하는 진원을 보고는 요한은 힘이 빠진 걸음으로 예식장 안으로 향했던 것이다.


친구를 원망할 자격이 없음을 자책하며 요한은 진원의 가족석에 그의 가족에서 떨려난 기분으로 앉아있었다. 훤칠하게 잘생긴 신랑이 씩씩하게 입장하고, 아름다운 신부가 조신하게 들어서고, 그 둘의 성혼이 이루어지는 과정을 요한은 무감정하게 보았다. 그러다 신랑 모친의 취향에 맞춘 고상한 축가가 울려퍼지고 신랑신부가 하객들의 축하 속에 행진을 하고 나서 기념사진 촬영이 시작되자 요한은 정신이 들었다.


신랑신부의 직계가족 촬영이 시작되자 하랑은 가자 오빠, 라고 속삭였으나 요한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따가 친구와 지인들 촬영 때 태수들과 함께하는 것으로 족했다. 하랑이 안타까워하며 자리를 뜬 뒤 김원장이 오라고 손짓을 했으나 요한은 두 손을 모으고 선 채로 고개를 저었다. 정여사가 억지로 그러지 말아요, 라고 남편에게 속삭이고 신부의 어머니 한여사가 왜 저런대… 하다가 아이고 그 청년이구먼! 손뼉을 치며 수군거리자 촬영을 구경하거나 차례를 기다리는 하객들도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요한은 쥐구멍에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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