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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사랑만이 존재한다

日常有感 - 10.

by 지구인




마침내 연재소설 <부등변삼각형>(의 초고)을 탈고하고 쉬는 중이다. 2년 가깝게 걸린 작업시간 속에서, 나는 그 어느 때보다 글자를 읽는 게 싫어졌다. 내 글을 구상하고 쓰고 퇴고하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그리하여 작업기간 동안 '새로 읽은 책'이란, 지난해 여름에 읽었던 닐 도널드 월쉬의 <신과 나눈 이야기 Conversations with God> 본편(원작은 9권에 육박하나 우리나라에서는 모두 나오지 않은 듯하다) 1~3권과 부록편(?) 2권뿐이었다. 그 외에는 밥 먹을 땐 유튜브를 보고 여가시간에는 영화/드라마/웹툰(주로 19금!)만 보았을 뿐이다. 활자중독 증세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착각이었거나 치료?하였음을 알았다?!


어쨌든, 연재를 쉬면서 연말을 맞이하여 지난 일기와 더불어 최근에 위의 책 중 1권을 다시 읽는 중이다. 그러다가 지난해에 시리즈를 처음으로 통독하고 나서 써둔 후기를 갈무리해 본다.







우주는 곧 신이고, 신은 곧 나(우리)이다, 저자에 따르면. 사실 이런 말들은 뉴에이지? 뭐 그런 쪽에서도 말해왔고, 특히 불교에서는 원죄를 지어 구원을 받아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 깨달아 부처가 될 수 있는 존재로서 인간을 보았으므로 비슷한 이야기이긴 하다.


이 책이 흥미로웠던 것은 내가 아는 불교의 열반은 자기 자신을, 자아라는 것에서 벗어나 마침내 우주와 하나가 되므로 환생을 끝낸다는 것인데, 이 책에서는 열반에 들더라도 다시 인간계로 돌아오며 그 순환은 끝나지 않는다고 하는 점이었다(굳이 말하자면 아마도 그 영혼은 다시 인간계로 돌아오는 것을 ‘선택’한다고. 불교에서의 보살들처럼). 나는 그동안 깨달아서, 이 괴로운 번뇌를 끝내길 소원하였는데 이 책의 내용이 맞다면 그건 영 안 될 일이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수긍이 되었다. 왜냐하면 나는 이 우주가 한 점?에서 시작해서 팽창하다가 끝내는 다시 한 점으로 수축하는 것을 끝없이, ‘동시적으로’ 반복한다는 것을 믿기 때문이다(그 한 점은 블랙홀이라고 생각한다). 수많은 우주설 중에 가장 거부감 없이 내게 스며들었던. 우주가 반복순환한다면 환생 역시 그렇다는 것이 논리적이지 않은가? 심지어 이 책은 다세계우주론(맥스 테그마크의 설명에 따르면, 다세계는 현재 물리학 이론 안에서는 당연한 귀결이라고 한다)과도 일맥상통했다.


신이 있더라도 인간이 만들어낸 물질계? 외의 또 다른 존재가 아니라, 물질-의식-영혼 모두를 포함하는 모든 존재 그 자체이므로, 우리 인간이란 그 존재(신)가 스스로의 존재를 체험하고자 만들어낸 것들이라는 것이 이 시리즈가 의미하는 핵심이다. 그리고 이 책들이 신이 전해준 말이든, 저자가 ‘정신 나가서’ 만들어낸 말이든 - 그러니 책에서도 다 믿지 말고 스스로의 믿음을 찾으라고 한다 - 꽤나 재미있는 ‘이야기’임은 틀림없다(책을 대여하기 위해 공립도서관 세 곳을 들렀는데, 그중 한 곳에서는 이 책들이 문학으로 분류되어 있었다. 보통은 종교 쪽에 있던데… 아니면 에세이로. 분류자가 한글제목에 ‘이야기’가 있어서 그냥 그렇게 구분해 버린 것 같다. 심지어 원제는 이야기story가 아니라 그저 대화conversation이다!)


적어도 저자는 꽤 똑똑한 사람이다. 책이 쓰인 시기가 최근으로 갈수록 그가 인용하는 책들이나 주장이 점점 많아지고 정교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미 세상에 존재했던 것들을 잘 짜깁기했을 뿐이라도, 웬만한 ‘사이비 이단 교주’보다 훨씬 훌륭하다. 라디오토크쇼를 오랫동안 했다니 말발도 매우 좋고. 이혼 다섯 번(결혼은 여섯 번?! 남자 엘리자베스 테일러임)과 자식 아홉 명(아마 가톨릭신도로 자라서 그런지 생기는 대로 낳은 듯?)…은 좀 그렇지만 비싼 승용차를 끌고 다니며 젊고 어여쁜 미녀들과 난교?를 즐겼다는 오쇼 라즈니쉬보다 훨씬 가정적?이지 않나!


그 책들의 핵심은… 신은 자신을 체험하고자 우리를 만들어 우리의 체험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진정으로’ 알게 되며, 오직 우리를 사랑할 뿐 미워하거나 죄를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기독교의 원죄와 구약에서의 벌주는 신에게 강한 거부감을 느꼈던 나로서는 책에서 관련된 내용이 나올 때 통쾌했다. 어찌 신이 삐친 아이처럼 자신만을 믿고 따르지 않는다 하여 벌을 주며, 자유의지를 주었다면서 어찌 자신에게 귀의하지 않으면 지옥에 보내는가? 다만 나는 예수가 좋았다. 한 뺨을 맞으면 다른 뺨을 내주라 했던 그,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고 했던 그, 십자가에 못 박혔을 때 아버지, 어찌 나를 버리시나이까? 울부짖다 끝내는 아버지, 당신 뜻대로 하소서, 라고 했던 '인간적인' 그를 사랑했다. 그리고 그는 김규항의 칼럼집 <B급 좌파>에서의 어느 글에서처럼, 교회에는 없다. 그곳에 들어가는 사람의 손을 놓는다.


나는 신에게 벌 받고 싶지 않았다. 미움받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기독교의 신에게는 동조할 수 없었다. 이미 차고 넘치는 자기혐오에 그의 미움까지 얹을 필요는 없었다. 나는 나를 만들었다면서, 굳이 자유의지를 주고 그에 따른 벌을 주는 그가 싫었다. 나에게 필요한 것은 그의 사랑과 보살핌과 구원일 뿐이었다. 그런데 오만한 나는 또한 예수든 누구를 통해 구원받고 싶지는 않았다. 나 스스로 구원받고 싶었다. 그래서 ‘먼저 깨달은 자(선각자)’이며 스승이며 선배 격인 붓다를 보다 좋아했다.


그러나 역시 불교신자가 되지는 않았다. 종교는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다. 거기에 '진정한 신'은 없다. 그리고 나는 신이 아니라 우주 자체가 신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맥스 태그마크의 유니버스>에서 우주의 근본은 수학적 체계라는 주장을 읽고는 그럴 수도 있겠다 생각했다(우주의 언어는 수학이라지 않나).


저자는 자신은 종교에 대해 말하는 게 아니라 신학에 대해 말한다고 했다. 동의한다. 시리즈가 계속될수록 그는 일종의 ‘의식개조 운동’을 부추긴다. 우리나라에도 1만 명의 회원을 보유한 네이버카페가 있더라만, 거의 사장된 것 같다. 개인의 삶조차 너무 힘들어서 그런 게 아닌가… 싶긴 하다. 뭐 나부터도 내 개인의 안위를 위해 이것저것 둘러보다 닿은 거니까. 책에서 위안을 받았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추천해주고 싶고 나아가 저자가 말하듯 나도 관련한 무슨 모임이라도 만들든지 하고 싶다만, 시리즈를 읽고 난 당일에 나는 다시금 마음을 갈피잡지 못하고 배달음식과 맥주에 기대어 잠을 청했지 않은가. 울 뻔했지 않은가. 술김에 신을 원망하며 주정하지 않았던가 다시금… 나는 아직 그 정도인 것이다, 여전히.


또 하나 다시금 깨달은 것은, 우리가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데에는 다양한 ‘차원’에서의 대응방식이 필요하다는 점이었다.


책에서 예를 들었듯이,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 설령 죽음이라는 것은 잠시 현재의 육신을 벗어났다가 존재의 본질을 깨달은 후 또 다른 삶을 향해 가는 것이라고 해도,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신=인간의 의지였다고 해도 그 순간의 우리는 슬퍼해야 하고 위로해야 한다. 우리는 인간 안에서도 여러 가지 차원에서의 인간으로서 기능해야 한다. 부모로서, 자식으로서, 친구로서, 동료로서… 기타 수많은. 순간순간에 우리가 기능해야 할 차원도 다를 수 있다. 보다 높은 차원에서, 사랑하는 마음으로 보듬는 마음으로 해야 하지만 때로 우리는 ‘전쟁을 막기 위해 전쟁을 불사해야 한다’. 어쩌면 세상이 모순과 역설로 가득 찬 것은 당연하다고 느꼈다. 세상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에는 당연히 빛과 어둠이 함께 있다. 그리고 어둠이 있어야 우리는 빛을 알 수 있다… 우리는 모두 상대계에 존재하기에.


신/우주가 자신을 알고자 하나이자 그 자체인 자신을 분리하기 시작했듯이, 인간의 지식 역시 극도로 분화되어 가다가 다시 통합되어 연구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마침내 하나로 통합되어 모든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다시 분리가 시작될 것이다. 가모장제에서 평등을 거쳐? 가부장제로, 다시 평등을 거쳐 가모장제로, 다시 가부장제로… 그렇게 반복될 것 같다. 지금은 가부장제에서 평등을 거치는 중인 것 같다. 보다 원시적으로 회귀하고 있는 중인 것 같다. 결혼제도는 마침내 종말을 고하고, 자식을 낳아 기르는 부모관계가 중심이 될까? 유럽은 그렇게 되고 있는 중이라 들었다. 그리고 그게 많아지면 다시 결혼제도를 그리워하겠지. 어쩌면 더 진보한 제도를 갖게 될지도 모르고. 계속해서 정반합을 이루어가게 될 것이다, 모든 것이.


그래서 다시 나에게로 돌아온다.


신이 나라는 것은, 내가 신이라는 것은 아직 잘 모르겠다. 신의 작은 한 부분? 정도는 인정할 수 있다. 신은 모든 것인데, 내가 어찌 모든 것이겠는가. 나는 모든 것의 한 요소이다. 모든 집합 중의, 하나의 부분집합일 뿐이다. 우리 인간들은 나름의 집합이고 우리가 사귀고 사랑하는 대상은 그 교집합에 근거한다. 그리고 모든 인간들을 아우르는 교집합은… 아마도 비어있다. 모든 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까지 포함하므로. 블랙홀에는 모든 정보가 있으나 원래의? 형체?는 없다. 그렇게 보면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으나, 모든 것이 있다.


우리 각자의 삶이 전생에서의 결과이고 우리가 택한 것이라는 주장?은 이미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타나토노트>에서 읽은 바였다. 이 책들에서도 비슷한 이야기를 한다. 모든 것이 다 우리가 스스로 선택한, 원한 결과이되 이미 일어난 점이라는 시각은 동시성을 말하며, 그 동시성은 또한 테드 창의 소설(영화 얼라이브)의 세계관과 닮아 있다. 이러하므로 이 책은 기존 많은 것들의 짜깁기이자 책 스스로에서 말하듯 이미 수많은 다른 사자(전달자)를 통해 알려준 신의 말인 것이다. 아니더라도 상관없는 것이, 그 책들의 내용이 우리들의 삶을, 생각을, 사랑을 달래주고 북돋아주고 진화하게 만든다면 충분히 가치 있는 게 아닐까.


그러하므로 감히 말하건대, 우리가 후손들에게 단 하나의 문장만을 남겨야 한다면, 나는 ‘모든 것은 원자로 이루어져 있다’라는 근사한 명제보다는 소박하고 평범한 ‘사랑해’라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특히나 우리말로써. 우리말은 주어와 목적어가 없어도 기능하므로, 이 말은 내가 너에게, 네가 나에게 등 모든 주어와 목적어가 올 수 있고 심지어 명령어로서도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모든 것을 사랑해(라)’.


우리가 현실이라고 인식하는 차원에서 해볼 수 있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이 ‘사랑해’란 말을 아침에 일어나서 10번쯤 해보고, 수시로 중얼거리는 것일 것이다. 실제로 나는 이 말을 함으로써 충만함을 느꼈고, 느끼는 중이다. 우울과 좌절감과 불안이 몰려올 때도, 나는 이 말들을 읊조렸다. 계속해서 쉬지 않고 꼿꼿이 버틸 수는 없었지만, 쓰러진 나를 결국 다시 일으켜 세운 것은 그것이었다. 그제 나는 또다시 울었었고, 어제 다시 밖에 나갔다 왔고, 오늘 마침내 노트북을 켰다. 그리고 글을 쓰고 있다… 다시금.






이것은 지껄임이다. 나는 고립했고 고독하므로, 스스로에게 말하고 답하는 것뿐이다. 아직은 타인까지 나임을, 모두가 하나임을 체화하지 못했으므로 타인과의 만남과 대화는 내게 부담을 준다. 에너지를 뺏기는 느낌이다. 아직은 나의 코어를 단단하게 만들지 못했다, 세상에 나아갈 만큼. 당당해질 만큼. 아마 앞으로도 좀 더 시간이 걸릴 듯하다. 1년 이상. 2년 정도면 총 3년이니 괜찮지 않을지…? 아이고.


지난 2년 간 지난 수십 년보다 더 많은 영적 성장을 이룬 것은 분명하다. 그러므로 이 시간들은 내게 꼭 필요한 것이고 지금의 이 공간, 즉 이 시공간은 나의 커다란 행운이다. 이는 앞으로의 나의, 세상으로 마침내 나아갈 나의 안식처이자 디딤돌이 될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뭐 그건 또 그대로의 의미가 있겠죠.


나는 해방되고 있다. 속박에서 벗어나고 있다. 그러나 방종하지는 않아야 한다. 쉽지 않다. 나는 여전히 아무것도 아니고… 설령 무엇이 된다 해도… 과연 나의 이 본질과도 같은 슬픔과 우울이 사라지긴 할까? 삶 자체가 축복이고 신이라는 명제에는 동의하지만 그는 의식의 영역이고 왜 나의 느낌과 영혼에는 슬픔이 각인되어 있는가. 왜 그렇다고 느끼는가. 느낌은 영혼의 언어라고 했는데. 어쩌면 죽을 때에야 비로소 열반에 들어, 그 모든 것을 행복하게 감싸 안을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모든 모순과 역설과 불안과 두려움을 이겨내고, 아니 그조차도 진심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앞으로 최소 1년은 더 고립되어야 할 것 같은데… 과연 나의 몸과 마음이 버틸 수 있을까. 그와, 그것을 포기하면 나는 사는 것이 아닌데… 이미 가졌다고, 이루어졌다고 생각되지 않는 것이 실제 그러해서 그런 것이라면 어찌하나. 그렇다면, 잘 정리해서 떠나면 되는 게지. 그렇게 생각하고 시작한 일 아니었던가. 그래, 그래. 끌어당김? 모르겠다. 나는 그냥 내버려 두련다. 바람에 맞서지 않고 바람에 몸을 맡기련다. 그냥 바람이 되고 마련다… 받아들이련다.




- 참고 서적 -





신과 나눈 이야기(합본)



닐 도날드 월쉬2012아름드리미디어














타나토노트 세트



베르나르 베르베르2000열린책들









B급 좌파



김규항2002야간비행












맥스 테그마크의 유니버스



맥스 테그마크2017동아시아












당신 인생의 이야기



테드 창2020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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