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들의 마음의 병에 관한 기사를 읽고서
http://mnews.joins.com/article/22515277#home
- 청년들이 마음의 병을 얻고 살아간다는 기사다. 대학을 다니면서, 대학을 졸업하고서, 직장을 다니면서, 다양한 경로로 출발해서 우울증과 죽음이라는 동일한 도착점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기사에서는 청년들의 정신건강에 대한 전수조사나 제대로 된 통계조차 없다고 이야기한다. 지금 있는 통계의 대부분도 입대하기 전에 군대를 가지 않기 위해서 부모의 손에 이끌려서 진료를 받은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티비만 틀면, 포털사이트 1면에는 항상 청년들의 삶이 피폐하고 그것에 대한 대책이 필요하다고 떠들지만 해결책은 고사하고 제대로 된 통계조차 존재하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정부는 청년 대책으로 연일 일자리 대책을 내놓고 있지만 그것만이 청년들의 삶을 개선해 줄 수 있을 지는 의문이다. 물론, 하지 않는 것보다는 훨씬 낫겠지만 말이다.
- 나도 우울증이 있고,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정신과를 다니면서 약을 복용하고 있다. 정신질환을 얻게 되는 경로는 다양하다. 누군가는 가정에서 부모에게, 어떤 사람은 학교 폭력의 기억으로, 어느 사람은 직장에서의 성희롱과 스트레스로 정신질환이 생긴다. 정신과에 가서 짧은 시간 이지만 상담을 받아보면, 약도 약이지만 스트레스 요인으로 부터 피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한다. 다양한 삶의 조건에서 정신 질환을 얻는 청년들이지만, 그들은 공통적으로 스트레스 요인으로 부터 피할 수 있는 '권한'이 없다. 가정으로 부터 학대를 받는 청년은 집에서 독립할 돈과 직업이 없다. 부모의 학대는 보통 그들의 경제적 무능에서 발생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그 경제적 무능은 그 자식에게 가난으로 상속된다. 직장과 일에서 스트레스 받는 청년들은 이제 막 신입사원이고 회사의 '막내'들이다. 그들은 회사에서 자신의 공간을 지키고 배려받을 수 있는 힘이 없다. 자신을 성추행한 상사가 있는 회식자리에 또 나가야하고, 아무 설명과 보상없이 이어지는 야근과 업무요구만 빗발친다. 청년들은 스스로를 돌보고 자신을 스트레스 요인들로부터 지킬 수 있는 '권한'이 없다. 사회는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요즘 세상에 우울증은 감기 같은 것이라 정신과에 가면서 약먹으면 괜찮은 것이라 이야기한다. 일면 타당하지만, 한국에서 대부분 치료조차 필요없는 병인 감기에 항상 과잉진료가 문제되는 원인을 생각해보자. 독일에서는 허브티를 먹고 비타민제와 함께 '휴식'을 처방한다. 한국에서는 비타민제와 차를 마시며 여유롭게 몸을 돌 볼 수 있는 시간도 여유도 없다. 이러한 휴식의 가능성은 소득이 적고, 학벌이 낮고, 더 작은 기업에서 일을 할 수록, 직장이 없을 수록 극적으로 반비례한다. 그래서 우리는 하루아침에 나아서 내일 출근할 수 있는 강한 약을 선호하고, 먹어야만 한다. 내일 하루 쉬면 감기는 나아지겠지만, 장기적인 삶은 무너진다. 항생제가 가득한 약을 먹고 회사에 출근해서 기침을 하더라도 앉아있는다. 그것이 한국의 미덕이고, 특히 건강하고 젊은 청년들에게 요구되는 미덕이다. 젊을 때는 내세울 것이 몸 뿐이니 몸으로 떼워야 한다.
우울증도 마찬가지다. 스트레스 요인에서 떨어져서 휴식을 취하면서 여유롭게 몸과 정신을 돌볼 수 있다면 우울증은 정말 감기 같은 것일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불가능한 조건에서는 자신의 목숨과, 타인의 목숨까지 위협하는 중대한 '질병'이 된다. 간단한 삶의 아픔이 '질환'이 되고 그것이 '중대한 문제'가 되는 것은 사회적인 맥락이 작용한다. 우리 사회는 간단한 감기와 우울증을 '질환'으로 만들고, 이제는 그것을 '중대한 문제'로 까지 만들어가고 있다.
- 기사의 마지막에 모든 문제를 정신과 상담이나 약물로만 해결 할 수는 없다고 이야기한다. 삶에서 겪는 아픔, 여러 가지 어려움들을 모두 병원이 해결할 수는 없다. 이런 것들은 사람과의 관계에서 나누고 고민해서 해소해야하는 것들이다. 적어도 사회적 공동체가 구성되어 있던 얼마 전 과거에는 그렇게 해소되었다. 그 공동체가 만들어지고 운영되는 방식이 어떠했는지는 차치하고 서라도 '공동체'가 존재했다는 사실만으로 함께 해결할 수 있는 힘이 되었다. 이제 그런 공동체는 없다. 적어도, 그런 공동체는 일정 수준 이상의 돈과 권력을 가진 사람들만이 가질 수 있다. 청년들은 이러한 공동체를 경험한 적이 없다. 그래서 상상할 수도, 느낄 수도 없다. '개인'으로서만 존재하고 살아온 사람들은 아픔에 대한 해결도 개인적일 수 밖에 없다. 병원에 가거나, 술을 먹거나, 게임을 한다.
개인적인 차원에서가 아니라 우울증을 '질환'에서 '중대한 문제'로 만드는 사회적 차원에서 청년들의 삶의 결핍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공동의 경험, 공동체, 공공성 따위 것이 필요하다. 함께 이야기하고, 고민하고, 감정을 나누고, 공감하고, 삶의 작은 변화를 만들어내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 것들은 자신의 용기가 타인에겐 치유의 경험을, 공동체에는 행복의 경험을 공유하게 해준다. 이 공동체는 정치적일 수도, 정말 '취미모임'일 수도 있다. '함께 모여서 고민하고 만들어간다'는 원칙만 지켜나갈 수 있다면 무엇이든 괜찮지 않을까.
- 물론, 나는 우리가 사회적으로 질병을 '부여받은' 것이라 생각한다. 그것은 어떤 것을 규정하고, 분배하는 '정치'의 영역이다. 이것을 해결하는 공동체는 정치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정치적인 해결을 정치적으로 하는 것이야 말로 자연스럽다. 매우 정치적인 문제를 사적이고, 개인적이고 탈 정치적인 로맨스의 맥락으로 해결할 수는 없다. 태초에 공동체가 구성되기 이전에는 '정치'는 가장 자연스럽지 않은 행위였겠지만, 국가든 민족이든 공동체가 없이 존재할 수 없어진 현대인들에게 정치는 가장 자연스러운 행위이다. 그러니 자연스러움에 몸을 맡기고 살아야 한다. 가장 자연스러운 '정치적 공동체'를 만들어야한다.
- 그러니 요즘 유행하는 힐링 열풍은 매우 자연스럽지 못하다. 매우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이유로 상처받은 사람들이 정작 그 치유는 공동체를 떠나고, 풀이 가득한 곳으로 이주한다. 심적인 안정은 생기겠지만, 정치적인 해결이 없다면 근원적인 해결을 상상할 수도 도전할 수도 없다. 자연인이 되자. 정치적인 인간이 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