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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다 Jul 10. 2019

제목 미정 4.

결국은 모두를 위한 일.

[결국은 모두를 위한 일]


한국 사회에서 장애인들은 오랜 시간 동안 이동할 수 있는 권리 '이동권'을 주장했습니다. 얼핏 듣기에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 권리지요. 이동은 그냥 하면 되는 것인데 권리씩이나 붙이는 이유가 있을까요? 지하철은 있지만 지하철에 엘리베이터가 없던 시절에 장애인들은 지하철을 탈 수 없었습니다. 버스는 있었지만 휠체어가 탑승할 수 있는 저상버스가 없던 시절에는 장애인들은 버스를 탈 수 없었습니다. 장애인들은 이동할 수 없으니 집 밖에 나올 수 없었고 사회적으로 고립되었습니다. 장애인단체들은 지하철 선로에 몸을 던지고, 지하철 역에 몸을 쇠사슬로 묶으면서 싸웠고 그 결과로 대다수의 지하철 역에는 엘리베이터가 생겼고 저상버스가 도입되었습니다. 치열한 싸움의 결과였습니다.

이 싸움을 하는 동안 사람들은 한 목소리로 장애인들을 비난했습니다. '이기적이다.' '이러다가 출근 못하면 너희들이 책임질 것이냐' '니들 권리는 공무원들 찾아가서 해라 일반시민한테 왜그러냐' 등등 다양하지만 일관된 감성의 비난이 이어졌습니다. 하지만 장애인들은 집에 하루종일 고립되는 것 보다는 여기 나와서 욕을 먹는 것이 더 나은 삶이라며 싸움을 이어갔습니다. 

싸움의 결과로 장애인들은 완벽하지는 않지만 이동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는 결국 장애인들 만을 위한 것이었을까요? 무거운 짐을 끌고 힘들게 계단을 내려가던 할머니도, 다리를 다쳐서 목발을 짚고 다니는 청년도, 무거운 캐리어를 끌고 한국에 처음 온 외국인들도 결국 모두가 편하게 지하철을 이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장애인들이 싸웠지만 그 이득은 온 사회가 받고있습니다. 이처럼 사회적 약자의 싸움은 그들이 하지만 혜택은 우리 모두가 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장애인이 살기 좋은 사회면 비장애인도 살기 좋은 사회고, 노인이 살기 좋으면 청년도 살기 좋은 세상입니다. 모두가 살기 좋아야 더 살기 좋아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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