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길>

2019.8.19

by 바다

중학교 때였다. 좁디 좁은 골목 사이에 있던 우리집에 반 아이들이 찾아왔다. 거실도 없는 우리집 꼬라지를 보여주고 말았다. 나는 수치스럽고 죽고 싶었다. 아이들이 돌아가기 전까지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 때 당황한 표정의 아이가 나에게 "너희 동네 골목들이 참 이쁘다"고 했다.

그 아이가 당황해서 할 말이 없어서 그 말을 했다고 지난 10년간 믿었다. 하지만 살다보니 알았다. 사람은 아주 진심인 말만 하지 않지만, 진심이 하나도 없는 말도 하지 못한다. 그 아이 생각에는 우리 동네 골목이 조금은 이쁜 구석이 있었나보다. 다 똑같이 생긴 아파트에서 살아가는 아이들은 총천연색에 길조차도 울퉁붕퉁한 우리 동네가 이뻐보였을 수도 있겠다. 골목은 한 눈에 보이는 웅장함은 없어도, 알록달록한 아름다움은 분명 있다. 획일화 되지 않은 즐거움.

난 지금도 골목이 우거진 동네에 산다. 오늘 길을 걷다가 동네가 참 이쁘다는 생각을 했다. 질서 없이 이어진 골목들도, 제 마음대로 생겨먹은 집들도 그 자체의 멋이 있다. 무시무시한 철조망과 아주 날 것의 경고표지판도 정겹다. 온 동네가 호텔과 고층빌딩으로 둘러쌓여가는 중에 아직 이런 사랑스런 공간에 살아간다는 건 행운이지 않을까.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드는 이유는 골목이 갑자기 아름다움을 뽐내기 때문은 아니다. 내가 좀 더 나와 나를 둘러싼 환경들을 잘 이해하게 되었기 때문일까. 비로소 내 삶과 내 주변의 생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걸까. 오늘따라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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