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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다 May 28. 2020

<재난소득과 편의점 결제>

섬세하지 못한 정책이 비정규직노동자에게 부과하는 '불필요한' 감정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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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에서 전 국민에게 재난 소득을 지급했다. 중앙정부에서 지급한 금액도 있고, 각 지자체별로 지급한 금액은 따로 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통장에 바로 들어오는 '직접 복지'를 맛보니 달콤하다. 정부나 국가에 신뢰라곤 1도 없는 듯한 우리 동생도 정부의 정책에 대해 평한다. '이 정책 최고인 것 같다. 낙수 효과고 뭐고 직접 주는 것이 짱이다.' '경제 효과'가 아니라, 직접 주는 현금의 힘은 국가를 싫어하는 우리 동생도 애국자로 만든다.


세대주 지급이 원칙이라 나는 해운대구에서 지급하는 선불카드 5만 원만 선불카드로 받았다. 자주 가는 동네 카페가 있는데 그곳에서 알차게 썼다. 한 달 치 커피값을 해운대구에서 받으니 기분이 좋다. 진짜 국민이 된 것 같고, 내 존재만으로 돈을 준다니 자존감도 조금 올라간다. 일단, 돈이라니 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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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쓸 때는 신났다. 소비자일 땐 좋았다. 내가 계산하는 노동자가 되니 전혀 신나는 일이 아니었다. 힘들었다. 문제는 해운대구에서 지급한 5만 원짜리 선불 카드였다. 기프트 카드와 비슷한 카드라 카드를 긁어도 잔액이 표시되지 않는다. 카드사나 어플에 등록도 안되는 카드여서 모든 결제 확인을 문자로 하는 현대인들에게는 아주 불편한 카드다. 코나 카드 같은 형태로 지급했으면 어플에 등록해서 잔액 체크라도 할 텐데, 해운대구는 그 정도 성의를 보이지 않았다. 해운대구가 보여준 아쉬운 성의는 편의점 노동자인 나에게 손님들의 불만으로 돌아왔다.


5만 원이라는 금액이 참 애매하다. 마트나 백화점 가면 옷이라도 하나사 입겠지만, 대형 매장들은 사용이 금지되어 있다. 햄버거를 먹거나, 스타벅스를 가려고 하니 그 가게들은 본사가 서울에 있어서 해운대에서 사용할 수 없다. 사용처를 찾다가 집 앞에 있는 편의점에서 주로 쓰게 된다. 이것저것 귀찮아서 한 번에 5만 원 치를 사버리고 카드를 버리고 가는 '쿨'한 사람들의 경우에는 좋다. 길 가다 5만 원짜리 주운 기분 정도로 생각하는 듯하다. 문제는 이 5만 원으로 최대한의 '뽕'을 뽑으려고 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조금씩 구매해서 알차게 5만 원을 쓰고자 하는데, 잔액이 안 뜨니 얼마나 남았는지 계획을 세우기 힘들다. 그래서 어떤 분들은 결제를 할 때마다 잔액을 적기도 하고, 나 같은 경우에는 가계부 어플에 잔액을 등록 해놓고 썼다. 이마저도 귀찮은 사람들은 직원인 나에게 묻는다. '잔액 얼마 남았어요?'. 대답해 주고 싶지만, 편의점 영수증에는 카드 잔액이 표시되지 않는다. 저희 편의점에서는 확인이 안되니까 카드사로 연락하셔야 한다고 안내를 드린다. 좋은 일도 하루 이틀, 바른 말도 한두 번이다. 심하면 10번 가까이 같은 말을 반복하는데 귀찮다.


가장 큰 어려움은 결제에 있다. 편의점에는 '복합결제'라는 것이 있다. 쉽게 말하면 결제 수단을 2개 이상으로 해서 결제를 하는 방식이다. 현금 + 카드, 신세계 포인트 + 카드 등이 있다. 복합결제는 편의점 알바에게 가장 큰 고비 중에 하나다. 2개 이상의 결제 수단에 통신사 포인트 할인, 신세계 적립, 온갖 할인 쿠폰을 들이밀면 머릿속이 하얗게 변한다. 포스기로 막 찍는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정확한 순서에 따라 입력해야 결제가 되기 때문에 몇 번이나 골머리를 앓으며 고민해야 한다. 결제를 잘못하면 환불하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데, 쿠폰의 경우에는 환불이 바로 되지 않는 경우가 있어서 손님이 항의를 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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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운대구에서 지급한 선불카드의 잔액을 알 수 없다 보니 사람들이 일단 긁으라고 카드를 준다. '잔액이 부족합니다'라는 메시지가 뜨고 알려드리면 추리 게임이 시작된다. '음.. 이 카드에 3천 원 정도 있는 것 같은데, 3천 원만 결제하고 이 카드로 나머지 해주세요.' 나머지가 현금이라면 가능하기 때문에 3000을 누르고 현금을 선결제하고 카드를 긁는다. 또 잔액 부족이다. "죄송한데.. 잔액이 부족하다고 뜨는데요.." "아아.. 그래요? 그럼 2천 원만 해주세요." 이렇게 몇 번을 반복하다가 겨우 결제를 마치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결제 실수를 하면 현금 시재에 문제가 생기거나, 물건 재고에 문제가 생기는 편의점 노동자 입장에서 신경이 온통 곤두서는 일이다. 한여름에도 추운 가게에서 등에 식은땀이 흐른다. '실수하면 내 돈 나간다.'라는 생각에 바짝 긴장한다.


현금과 재난 소득 카드일 경우는 상황이 나은 편이다. 일단 시스템상 결제가 가능하니까. 문제는 재난 소득 카드를 포함해서 카드만 2개를 꺼내는 경우다. 내가 일하는 편의점은 카드 2개로 복합결제가 안된다. 카드는 1장으로 최종 결제만 된다. 그래서 카드를 2장 내밀면 안내를 한다. "죄송한데.. 저희가 카드 2장으로는 결제가 안되시거든요. 물건을 2번 따로 결제하시거나 하셔야 해요..". 대부분 손님들은 알았다고 말하고 주 결제 카드를 내밀지만, 다른 곳에서 카드 2장으로 결제를 해본 손님들은 '왜 안돼요? 다른 가게에서는 되던데?'. 또 설명을 이어간다. "카드 2장으로 결제가 되는 매장도 있는데, 저희는 시스템상 그렇게 결제가 안되세요. 죄송합니다." 그냥 시스템에 안되는 문제를 왜 내가 사과해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사과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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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운대구에서 재난 소득을 준다고 결정하고 회의를 할 때, '잔액조회'의 문제를 분명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예산의 문제든, 알 수 없는 이유로 지금과 같은 형태가 결정되었을 것이다. 사람들이 5만 원을 잔액까지 계산해가며 알뜰하게 쓸 것이라는 생각을 못 했을 수도 있다. 그냥 '5만 원으로 어디서 외식이라도 한 번 하지 않을까'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고. 이유가 무엇이 되었든 그들이 넣지 않은 잔액조회 기능 덕분에 비정규직 노동자인 내가, 그리고 또 어디서 인가 노동을 하는 누군가가 그 일을 대신하고 불만도 대신 듣고 있다. 섬세하지 않은 정책에서 발생하는 불만이나 불편함은 자연스럽게 약한 사람에게 내려간다. 잔액이 궁금한 사람도 그 카드에 있는 돈을 한 번에 쓸 수 없는 저소득층의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그 불만을 들어야 하는 사람도 최저임금도 안되는 돈을 받으며 일하고 있는 어떤 비정규직 노동자이다. 그러니 정책을 섬세하게 한다는 것, 불편이 생기면 그 불만과 불평은 누가 감당할 것인지 예상하면서 정책을 짜야 한다. 큰일 아닌 것처럼 보여도 그렇게 해야 나 같은 노동자들이 불필요한 감정노동을 하지 않는다. 조금만 더 섬세하게 일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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