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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다 Jun 23. 2020

[창비 서평] 살아남아서. 살아가기.

'유원' 백온유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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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알고 있는 한 죽은 자는 말이 없다. 억울해하지도, 슬퍼하지도 않는다. '죽음'은 살아있는 자. 살아남은 자의 문제다. 많은 이들이 동시에 죽어나가는 모습을 '참사'라 칭하며 특별히 더 끔찍한 일이라 여기는 것도. 죽은 자만 큼이나 살아남의 자가 많기 때문이다. '죽음'을 어떻게 다룰지는 얼마나 많은 인간이 그것을 목격했는지, 얼마나 관련이 있다 여기는 지가 결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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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가 가라앉고. 비행기가 폭파하고. 건설 현장에서 노동자가 죽어나간다. 군부독재의 서슬 퍼런 칼날에 맞서다가 죽어나간 사람들이 파악조차 할 수 없을 만큼 많다. 이들의 죽음은 '유가족'의 손을 빌려. '생존자'의 입을 빌려 세상에 알려지고  등장한다. '유가족'은 세상에 자주 등장한다. 그들은 어떤 이의 죽음을 슬퍼한 권리를 사회로부터 부여받는다. 그들은 끊임없이 슬퍼한다. 슬픔이 지속되는 동안 절절한 사연은 강 건너 구경하는 이들의 심금을 울린다.


'생존자'는 유가족과는 좀 다르다. 그들은 슬퍼할 권리를 얻지 않는다. 주체적으로 슬퍼할 만큼 제정신이면 안 된다. 그 끔찍한 경험 속에 살아남은 사람은 '특별하고' '이상한' 행동을 해야 한다. 끊임없이 트라우마에 시달리며 일상을 제대로 영위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 이 비정상적인 모습이 유지되는 동안 '생존자'는 위로받을 권리를 얻는다.


이 위로는 본인의 의사와는 무관하다. 주변에서 끊임없이 강제로 위로한다. 자신들의 슬픔에 빠진 사람들이 사건을 언급하고, 상처를 끄집어낸다. 딱지가 생겨서 아물어져 가는 사람을 치유하기 위해 딱지를 뜯어내기 다시 생살과 피를 본다. 피 흘리며 아파하는 모습을 보며 위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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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생존자'이자 '유가족'인 인간의 삶은 어때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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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원은 우연하게 일어난 화재 사건의 생존자다. 그의 언니는 그를 구하다가 죽었다. 그 화재로 언니를 비롯하여 10여 명의 사람들이 숨졌다. 그는 '화재 참사'의 생존자다. 한편으로 그는 언니를 잃은 '유가족'이다. 그의 주변인들은 그에게서 '언니'를 본다. 언니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들이 그에게 언니를 본다. 말끝마다 '너희 언니가 ~'로 시작되는 말을 끊임없이 듣는다. 학교에서 다른 학생들은 그를 '불쌍한 애'로 본다. 끔찍한 사건을 겪고 살아남은 아이. 주변 사람들은 '착하게 살아야 한다'라는 말을 고양이 간식 주듯이 던진다. 그는 늘 의문이다. '왜 나는 죄인으로 살아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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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언니'를 잃은 슬픔보다 살아남았다는 이유로 '죄인'처럼 살아야 하는 삶이 지긋지긋하다. 화가 나고, 감정이 생기지만 표출할 수 없다. 세상이 그에게 기대하는 모습이 있다. 언니처럼 착한 아이가 되거나. 기적적으로 살아나서 긍정으로 똘똘 뭉쳐서 착한 삶을 살아가는 천사 같은 인간이 되거나. 천사 같은 인간은 없다. 천사는 인간이 아니다. 화재가 났던 날 언니가 자신을 창밖으로 던졌고, 지나가던 아저씨가 받았다. 그 충격으로 아저씨는 한 쪽 다리를 절게 되었다. 그 이후 아저씨는 수시로 집에 찾아와서는 돈을 요구하고, 대접을 받아 간다. 그는 그 모습이 너무 싫지만, 은인이라는 생각에 표할 수 없다. 가슴 한편에 있는 죄책감으로 아저씨에게 도움이 되기 위해 물리치료사가 되어야겠다는 다짐을 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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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원의 인생은 친구 '수현'을 만나면서 바뀌기 시작한다. 수현은 살아남았다는 이유로 억지로 부여받은 감사함을 간직하고 살아가는 자신과 다르다. 그는 자신을 드러내는 것에 능숙하고, 매사에 주체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처럼 보인다. 아주 우연한 기회에 둘은 만나게 된다. 유원은 수현과 시간을 보내며 조금씩 마음속에 있는 상처, 감정과 마주한다. 자신을 불쌍한 아이로만 내리찍는 사람들의 시선을 불쾌해 하는 자신을 마주하고. 얼떨결에 자신을 구했다는 이유로 자신의 집에 맡겨놓은 보따리를 찾으러 오는 아저씨에 대한 분노도 느낀다. 아저씨에게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솔직히 전달한다. 자신을 위하는 척하지만 실은 자신의 언니를 기억하기 위해 노력하는 언니의 친구와도 거리를 둔다.


일련의 변화 이후에도 유원의 삶은 끊임없이 과거로 돌아가기도 하고, 앞으로 나아가기도 하는 시행착오를 겪을 것이다. 인간에게 불가역적인 변화란 없다. 분명한 것은 이전과는 다른 삶을 살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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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노동자의 가족. 가라앉은 배의 가족. 국가폭력으로 죽어 나간 사람의 가족. 아주 의도적으로 혹은 아주 잘 짜인 우연으로 사람이 죽어나간다. 우리 사회는 유독 '유가족'이 많은 사회다. 역사적으로 민주화의 경로를 지나오며 '유가족'에 대한 예우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들을 어떻게 매주해야 하는지는 정립되었다. 하지만 정작 그 '죽음'에서 가장 가깝지만 소외당하는 사람들이 있다. '생존자'다. 노동자의 가족은 등장하지만, 생사의 순간에 함께 있었던 동료들은 쉽사리 등장하지 않는다. 그들은 '생존자'이자. 동료를 잃은 '유가족'이다.


그들은 트라우마를 견디고 살아가며, 일상을 유지하기도 힘들다. 그  자신들이 그 순간을 꺼내기도 힘들고, 위로받기도 힘들다. 사건에 대해 꺼내면 돌아오는 것은 위로가 아닌 일방적인 대상화와 강 건너 불구경하는 사람들의 팔자좋은 걱정이다. 유원은 언니를 잃은 유가족이지만, 살아남은 생존자다. 그에게 너무 많은 무게를 함부로 지어주는 사회와 사람들. 자신들이 책임지지도 않을 연민을 남발하는 사람들. 그의 삶은 생존의 무게로 범벅되어 버겁다. 그러다 새로운 관계를 맞이하며 전환점을 맞이한다. 자신과는 다르지만 연결되어 있는 사람. 나름의 아픔을 가지고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사람을 만나며 무기력에 빠져있던 스스로를 건져낸다.


유원이 다시 삶으로 돌아오는 과정은 우리 사회가 '생존자'이자, '유가족'인 사람들을 어떻게 마주해야 하는지 힌트를 준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말하는 기회다. 낙인찍지도, 책임지지도 않을 연민을 던져대는 무책임한 사회의 스포트라이트가 아니라. 섬세한 감정을 나눌 수 있는 관계다. 세월호 유가족 옆에 함께 있던 심리상담사들. 활동가들. 자원활동가들. 그런 사람들의 존재. 새로운 관계가 필요하다.


얼마 전 이천 공사현장에서 화재로 29명의 노동자가 사망했다. 뉴스에서 유가족은 연일 눈물짓고 있었다. 얼굴조차 알아볼 수 없는 가족의 시신을 보며 오열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참담하다. 책을 읽으면서 궁금해졌다. 29명을 제외하고서 그 옆에서 일하고 웃고 이야기 나눴던 동료 노동자들의 감정과 삶은 어떠한지. 그들은 다른 현장에서 일하면서 그날의 트라우마를 간직하고 살아갈 텐데. 우리 공동체는 그 치유를 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지. 그들에게 다가가고 관계를 맺으려는 노력을 얼마나 하고 있는지. 책임자는 처벌되어야 한다. 제도는 정비되어야 한다. 다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으면 한다. 살아남은 인간들의 치유에 관한 섬세한 접근이 필요하다. 치유되지 못한 상처는 어떤식으로든 그들을 죽은 상태로 이끌 것이다. 세상에 아프고 쓰러져 가는 수 많은 사람들에게 '수현'과 같은 관계가 생기길 간절히 바란다. 나 또한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이 될 수 있기를 바라며 노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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