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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다 Jul 28. 2020

문제는 평등한 관계를 위한 '노력'

홍승은 작가. '두 명의 애인과 삽니다'

1.


'비독점 다자연애' 폴리아모리. 이 표현을 들으면 떠오르는 단어는 '불륜'이다. "사랑이 죄는 아니잖아" 같은 극단적인 드라마의 대사가 스쳐 지나간다. 그것도 아니면 쓰리썸 섹스. 일대일의 관계에서 행복한 삶을 살고 있던 가정에 타인 등장한다. 그를 중심으로 행복한 가정이 파괴되는 이야기. 일대일이 아닌 관계가 겉으로 나마 평화롭게 유지되는 경우는 현대극에서는 잘 없다. 조선을 시대적 배경으로 하는 드라마에서 왕이 정실부인과 후궁들을 거느리는 모습이 연상될 뿐이다. 일대일이 아닌 관계는 '재앙'이다.


2.


폴리아모리라는 '지향'에 대해서 들어보긴 했다. 책으로 읽기도 했고, SNS에서 이런저런 글을 만나기도 했다. '그냥 그렇구나'하고 무심히 넘겼다. 나의 일이라고 전혀 생각해보지 않아서 관심이 없었다. 일대일, 독점적이지 않은 관계를 상상할 수 없었다. 28년쯤 살아오면서 맺어온 관계는 아주 강한 독점을 전제로 했다. 끊임없이 문자를 보내며 '사랑한다'라고 말하는 것이 첫 연애였다. 학생 운동을 하면서 맺은 '동지'라는 관계는 서로가 서로의 삶에 아주 강하게 개입했다. 일상, 재정, 계획과 감정까지 모든 것을 공유해야만 했다. 숨기면 동지가 아니었다. 그것이 불편하면 동지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 되었다. '사랑'이란 감정은 늘 '소유'와 맞닿아있었다. 소유자는 소유 대상에 대해 베타적인 권리를 행사할 수 있다. 땅과 건물을 소유하고 있는 소유주들이 행사하는 권리를 보자. '소유'의 강력함에 대해 알 수 있다. 아무리 대단한 재개발을 한다고 해도 소유주들에게 권리를 넘겨받지 않고서는 진행할 수 없다. 법률과 공공성 따위보다 한참 위에 있는 것이 소유의 권리다.


3.


한국 사회는 자본주의사회고, 여러 자본주의 국가 중에서도 '소유'가 최종적이고 강력한 권리로 자리 잡고 있다. 소유해야 이익을 볼 수 있고, 힘을 행사할 수 있다. 그래야만 지속 가능한 삶을 영위할 수 있다. 사람들은 그렇게 믿는다. 삶의 목표는 집과 차의 소유. 튼튼한 가정의 소유. 명품 시계, 이쁜 옷. 구매하고 최종적으로 베타적인 소유권을 확립하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


이런 세상에서 나름 체제 저항적으로 살아왔다고 자부했다. 나는 베타적인 소유권만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과는 다르다고 믿었다. '소유'를 넘어선 어떤 삶과 관계를 지향한다고 자부했다. 이제 와 돌이켜보니 '지향'은 했을지 모르지만 벗어나지는 못했다. 대다수의 사람들과 삶의 모습이 달라지면서 '소유'하고자 하는 대상을 집이나, 차, 물건에서 '관계'로 바꾸었다. 구매해서 가질 수 있는 것에 대한 욕심은 줄여나갔지만, 줄여나간 만큼 관계에 대한 집착은 더 커졌다. 주변 관계, 사람을 잃는 순간 모든 게 끝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집을 잃고, 차를 잃으면 인생이 끝난다고 절망하는 사람과 다르지 않았다. 대상만 달랐을 뿐이다.


사람들이 내 주변을 떠나지 않도록 애썼다. 감정적으로 착취를 하기도 하고, 스스로를 착취해서 타인에게 헌신하기도 했다. 타인에게 집착하면 할수록 그에 대한 통제욕이 커졌다. 나랑만 고민을 이야기하고, 나에게 제일 의지하고, 나를 제일 존경하고, 나와 있을 때만 행복한 사람을 원했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나만 바라볼 수 있게 만들려고 애썼다. 그 과정은 감정을 통한 헌신이기도 했고, 내가 가진 권력을 이용한 억압이기도 했다. 떠나면 안 되기 때문에 서로 옆에 붙어있는 관계가 되어갔다. 결국 붙어있을 이유가 없어지자 관계는 모두 흩어졌다. 이유가 없어졌기 때문도 아니다. 원래 관계는 만나고 헤어지니까.


4.


책 제목을 보자마자 강렬했다. 범죄의 현장을 마주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노동을 하면서 틈틈이 읽었다. 이 책을 읽는 동안 한 번도 표지가 위로 향하게 책을 놔둔 적이 없다. 늘 노트와 필통으로 제목을 가렸다. 누군가 할지도 모를 질문이 두려웠다. '너도 이런 사람이니?.


읽으면서 생각을 해봤다. 두 명의 애인과 함께 사랑하고 지내는 내 모습을 그려봤다. 도통 그려지지 않았다. 내가 중간에 군림하고 있고, 나와 관계 맺는 애인들이 질투하고 싸우는 모습만 떠올랐다. 불안하고 힘든 상황으로 느껴졌다. 표지만 봐도 부담스러웠다. 끝까지 읽어낼 수 있을지 걱정이었다.


5.


문장을 읽어나가면서 '표지가 잘못 끼워졌나' 하는 생각을 했다. '폴리아모리'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세 사람의 이야기는 상상과 너무 달랐다. 쓰리썸 섹스에 이성을 잃은 사람들이 아니었고, 한 명을 두고 두 사람이 서로 질투하고 싸우고 공격하는 날카로운 관계도 아니었다. 일대일 관계를 맺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일상을 세 사람도 살아가고 있었다. 세 명 모두가 부처 같은 사람이라 모든 것을 이해하고 헌신만 하지 않았다. 불만을 이야기하고, 싸우기도 했다. 사소한 습관과 스타일로 부딪히는 일도 있었다. 질투하고 속상한 마음도 있었다. 특별한 일상을 기대했지만, 평범했다. 특별한 일상이라는 표현이 말이 안 되긴 하지만. 일대일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대단한 일들의 연속일 거라 믿었지만, 아니었다.


6.


친구와 폴리아모리에 대해 이야기했다. 우리의 대화에서 가장 많이 등장한 단어는 '책임'이었다. 둘 다 관계에서 책임감이 제일 중요하다고 믿는 사람들이다. 폴리아모리는 관계에 대해 책임지지 않는 태도라고 생각했다. 서로 책임지고 있는 사람이 있는데, 갑자기 딴 사람에게 마음이 생겼다고 다 같이 만나겠다고 하는 건 상대에게 너무 큰 상처를 주는 일이라 생각했다.


작가도 그런 질문을 많이 받아서 그런지 서로 관계에서 '책임'지는 것들에 대해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손을 잡고, 이야기를 하고, 밥을 먹고 집을 청소하는 일. 사소한 부분 하나하나까지 함께 논의하고 합의했다. 서운한 감정을 충분히 이야기하고, 공감해 주기 위해 애썼다. 따를 만한 관습적인 규칙도 없고, 독점적 연애의 룰을 따르고 싶지도 않았고, 하나하나 조율하고 합의하는 방법뿐이었다고 한다.


7.


마지막 장을 덮고서 반성을 했다. 사회적 편견에서 자유롭게 살아가기 위해 애쓰는 삶이라 믿었다. 뚜렷한 한계가 있었다. 독점적인 일대일 관계에서 그 대상이 이성이든 동성이든 그 어떤 성 정체성이든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어떤 한 사람이 타인에게 끌림을 느끼는데 이성이 아니냐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여기까지였다. 일대일을 넘어서 다자로 넘어가니 거부감이 들었다. 불안정해 보이고, 너무 많은 갈등이 생겨서 관계가 금세 깨어질 것만 같았다.


편견이었다. 일대일, 독점적 관계에서도 갈등은 늘 생긴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고 사랑하면서 갈등이 없을 수 없다. 갈등이 생기지 않는다면 누군가가 상처받고 있다. 수많은 일대일 관계에서 갈등은 폭력이 된다. 데이트 폭력, 부부강간, 가정 폭력 그 독점적 관계에서 생긴 갈등으로 지금도 수많은 약자들이 위태로운 조건에 놓여있다.


독점적이냐, 다자냐를 넘어서 서로 안전한 거리를 지키며 행복한 '지금'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당연한 것들을 끊임없이 질문해야 한다. '당연히 너는 나만 사랑해야 해.' '당연히 너는 다른 사람을 만나서는 안돼.' '당연히 너는 나와의 관계에서만 행복해야 해.' 낭만이라 포장하고, 당연하다고 의심하지 않는 많은 전제들은 폭력의 전조가 된다.


책의 추천사에서 김도현 님이 이 책은 '사랑'에 관한 책이라고 소개했다. 적극적으로 동의한다. 이 책은 단순히 폴리아모리를 지향하며 살아가는 것은 어떤지에 대해 소개해 주며 끝나는 책이 아니다. 어떤 형태로 관계를 맺고 있든, '소유'하려고 하고 통제하려는 관계의 습관에 대해 의심해보아야 한다는 성찰 지점을 던져준다. 소유와 통제와 분리된 '사랑'은 어떻게 할 수 있을지. 당연한 전제들에 끊임없이 질문하면서 차근차근 함께 합의를 만들어가는 관계의 소중함과 필요성을 느꼈다.


8.


폴리아모리는 변태적 섹스만을 하며 살아갈 것이라 믿는 사람들. 일대일 독점 관계와는 완전히 다른 일상을 살 것이라 상상하는 사람들. 일대일, 독점적 관계가 안정적이고, 폴리아모리는 바람과 불륜에 불과하다는 사람들. 모두에게 책을 추천한다. 문제는 일대일이냐, 다자냐 하는 숫자가 아니다. 관계를 맺는 방식, 사랑을 이해하고 실천하는 방식. 사랑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노동하는 수고스러움이다.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201910230470773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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