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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다 Sep 07. 2020

5. 조기 퇴근

#90일간의글쓰기대장정 #조기퇴근 #그냥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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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 하이선이 부산으로 다가오던 날. 나는 조기 퇴근했다. 내가 일하는 편의점은 오전 7시부터 새벽 3시까지 영업한다. 상호는 24이지만, 그것은 '2웃 4촌'이다. 가까이에 웃으며 기다리겠다는 의미지 밤샘을 하겠다는 뜻은 아니다. 태풍이 오고 있다는 정보는 있지만 감각은 없었다. 그저 비가 오니 우산을 챙겨야겠다는 마음으로 출근했다. 옷을 갈아입으러 창고에 들어가니 여기저기 청테이프와 밖에 있어야 할 박스들이 가득하다.


'어디 공사라도 했나?'


별생각 없이 옷을 갈아입고 시재를 확인했다. 좀 있으니 사장님이 식은땀을 흘리며 들어오신다. 손에는 테이프가 가득.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사장님은 가게 유리가 깨지지 않을까 염려하는 마음에 새벽 4시부터 12시간 넘게 본인이 사는 집, 소유하고 있는 상가와 편의점 유리에 테이프 공사를 했다. 편의점에 마무리 테이프 공사를 하러 오셨다. 태풍이야 매년 불었지만 유리창에 테이프를 붙여본 적은 없는지라 쭈뼛거리며 사장님이 시키는 일을 했다. 처음이라 몇 번이나 재공사를 했지만 어쨌든 마무리.


'태풍이야 매년 오는 것인데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사장님이 이렇게까지 태풍 대비에 열을 올리는 이유가 있었다. 서울에 사실 때 태풍이 불어서 아파트 한동 유리창이 와르르 깨지는 모습을 봤단다. 너무 충격적이어서 그 뒤에 태풍이 분다 그러면 대비를 철저히 하게 되었다고. 입버릇처럼 삶에 미련이 없다고 하는 사람인데 재난이나 손해를 보는 것에는 아주 민감하다. 아예 죽는 일이며 모를까 살아서 고통받는 것은 절대로 하고 싶지 않은 것이겠지. 잘은 몰라도. 나도 그렇다. 의식도 못하고 죽어버리는 일이야 무섭긴 해도 두렵지는 않다. 살아서 고통을 느끼며 발버둥 치는 일이 더 싫다. 나도 만약에 대비해서 이것저것 가방에 싸 들고 다니며 고생을 사서 하니. 사장님과 어떤 면에서 통하는 부분이 있다.


테이프 시공이 끝나고 사장님은 퇴근. 나는 일을 하고 있었다. 태풍의 여파로 신선 물품도 일찍 오고, 손님은 적었다. 빌딩풍이 극심한 이 동네에서 나라도 맥주 사러 목숨을 걸고 오고 싶지는 않을 테니. 가게 전화가 울린다. 사장님이다. 본인이 너무 피곤해서 잠들 예정인데, 바람이 심하다 싶으면 12시쯤 넘어서 마감하고 퇴근해버리라는 제안. 아 솔깃했다. 반가운 마음으로 감사함을 표했다. 퇴근 시계를 앞당기기 시작.


11시가 넘어서 폐기 음식을 꺼내고, 음식을 쓰레기통을 비운다. 커피 머신을 청소하고, 마지막 음료 냉장고 점검. 유통기한 체크. 바닥청소를 끝냈다. 12시에 포스 업로드를 했다. 드디어 퇴근이다.


'띵동'


인생사 뜻대로 안된다. 퇴근을 마음먹었을 때 들어오는 손님들. 바닥을 청소한 뒤라 바닥에는 발자국 가득. 건조해서 금방 말라버려서 다행이다. 손님들을 내보내고 유리에 붙일 안내문을 만들었다.


'태풍으로 인하여 영업을 조기 마감합니다. 죄송합니다.'


물론, 나는 전혀 죄송하지 않다. 죄송은 무슨. 나도 살아야겠고, 일요일 새벽에는 어차피 손님도 없다. 12시 32분쯤 정산을 끝내고 퇴근했다. 기대만큼 비바람이 심하지 않았다. 집에 가서 폐기를 허겁지겁 먹어치우고 누우니 본격적으로 비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유리창이 흔들린다. 비가 하늘에서 땅으로 가 아닌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수평으로 퍼붓는다. 원래 퇴근 시간인 3시가 되자 더 심해진다. 이 시간에 퇴근하고 집에 왔으면 어땠을지 생각하니 아찔하다. 살아서 집에 올 수 있었을까.


나, 사장님처럼 손해 피해에 대한 감각이 민감한 사람들이 있다. 겁도 불안도 많은 사람들. 소심한 성격과 합쳐지면 늘 노심초사하며 살긴 하지만 나쁜 면만 있지 않다. 위기에 대한 감각이 발달되어 있어서 재난이 터지기 전에 대비할 수 있다. 대비해도 재난에 안 당하면 좋고, 재난 당하면 버틸 수 있으면 좋으니까. 대비해서 나쁠 것은 없다.


좋은 사장 밑에 일하다 보니 편의점 조기 퇴근도 해본다. 4년 정도 편의점에서 일하면서 처음 있는 일이다. 지난 편의점에서는 태풍이 불건, 간판이 날아다니건 무조건 정해진 시간을 채우고 퇴근해야 했으니까. 비바람이 정면으로 불고 걸어 다닐 수 없을 땐 이미 늦는다. 그 징후를 포착하고 몸을 피하고 대비할 수 있는 자유, 여력 뭐 그런 것들이 필요하다. 다행히 난 그런 자유나 여력을 '허락' 받았고 무사할 수 있었다. 재난은 피할 수는 없고 대비할 수 있을 뿐인데, 예민한 사람들이 더 잘 대비한다. 그 예민함이 그 스스로뿐 아니라 자신이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또 다른 누군가를 지켜줄 수도 있다. 재난과 위기에 예민한 인간.


'이 정도로 안 죽는다'라고 말하며 떠나가는 수많은 사람들. 주로 남성들. 위기에 둔감한 사람들.

사람은 시도 때도 없이 죽고, 생각보다 쉽게도 죽는다. 죽는 것보다 문제는 다치고 아프다. 고통받는다.

'이 정도로도 죽을 수 있으니 조심하자'라는 사람은 얼마나 소중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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