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를 연주하면서, 삶도 피아노 연주와 비슷하다는 생각을 자주 하곤 한다.
어쩌면 피아노를 연주하듯이 살아야 한다는 생각도 든다.
한 번 시작하면 끝날 때까지 멈출 수 없다.
중간에 실수하거나 틀리더라도 되돌아갈 수 없고, 계속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한 음 한 음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실수하게 되고, 순간순간에 몰두해야만 제대로 된 연주가 나온다.
삶도 그렇게,
한순간 한순간에 집중하며,
한 음 한 음을 정성껏, 최대한 아름다운 소리를 내기 위해 노력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피아노를 처음 배운 건 아마 유치원에 가기도 전이었던 것 같다.
자매가 운영하던 피아노 학원이었는데, 두 분 선생님은 크리스천이셨다.
어느 해 성탄절 무렵, 학생들끼리 선생님의 지도 아래 예수님 탄생을 주제로 성극을 했던 기억이 있다.
나는 그때 ‘해설’ 역할을 맡았는데, 익숙하지 않은 이름과 잘 이해되지 않는 이야기들이 낯설고 신기하게 느껴졌다.
그래도 대사를 외우지 않아도 되어서 좋았던 기억이 난다.
부모님은 불교 신자셨지만, 종교에 대해 꽤 개방적인 태도를 가지고 계셨다.
크리스마스가 되면 아빠가 케이크를 사 오시기도 했는데, 내가 “아빠는 불교신자인데 왜 크리스마스에 케이크를 사 오세요?” 하고 물으면, 아빠는 웃으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예수님 생신도 축하드려야지. 부처님과 같은 성인이시잖니? 다 똑같은 거야.”
그 말이 다 이해되지는 않았지만, 따뜻하고 즐거운 분위기 속에서 맛있는 케이크를 먹을 수 있어서 기뻤다.
그때의 따스한 공기, 음악처럼 지금도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다.
이사를 다니면서 피아노 학원도 여러 번 옮겨 다녔다.
초등학생이 되어서도 월·수·금이나 화·목·토처럼 방과 후 피아노 학원에 들렀다.
물론 피아노 연습이 늘 즐거운 건 아니었다.
연습을 하기 싫을 때도 많았고, 숙제로 나온 곡을 한 번 연습하고 나면 선생님이 그려주신 꽃이나 별 모양에 색칠을 하라고 했는데, 그 색칠을 다 채우지 못한 채 학원을 갔던 날이 많았다.
제대로 연습하고 레슨을 받으러 간 적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초등학교 2학년쯤 어느 날, 충동적으로 피아노 학원을 빼먹고 친구 집에 놀러 간 적도 있었다.
‘김부자’라는 자그마하고 예쁘장한 친구였는데, 집에 돌아오면서는 엄마께 혼날 생각에 잔뜩 겁이 났다.
그런데 내가 “김부자네 집에 갔다”고 말하자, 엄마는 오히려 웃음을 터트리시며 “그 집 정말 부자더냐?” 하고 물으셨다.
혼날 줄 알았는데 웃으시다니!
기적 같은 일이었다.
그 친구 집에서 그날 처음으로 전기 연필깎이를 보고 신기해했는데, 이름처럼 정말 부자였는지도 모르겠다.
피아노와 인생을 이야기하다가 여기까지 흘러왔으니, 이런 게 바로 ‘의식의 흐름’일까 싶다.
언젠가 피아노 학원에 다니기 싫다고 투정을 부릴 때, 아빠가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다.
“나중에 어떤 직업을 갖든 힘들고 지칠 때가 있을 텐데, 지금 피아노를 배워두면 그럴 때 피아노 한 곡을 연주하면서 머리를 식히고 기분 전환을 할 수 있을 거야. 정신적으로 고단한 순간을 스스로 달랠 수 있지.”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은 말씀이었지만, 이상하게도 마음 깊이 남았다.
요즘 나는 상담을 마치고 피아노를 연주할 때면 그 말씀이 문득 떠오른다.
그때의 방 안 공기까지도 생생히 되살아난다.
나는 요즘 주로 집에서 온라인으로 상담을 한다.
내담자의 힘든 이야기를 들은 후, 무거워진 마음을 가볍게 하기 위해 피아노 앞에 앉아 연주한다.
아름다움으로 내 마음과 영혼을 다시 채우는 시간.
상담 전이나 상담과 상담 사이에도 피아노를 치며 마음을 가다듬고 정서를 환기시킨다.
그럴 때마다 “아, 아빠의 말씀이 이렇게 실현되는구나” 하는 마음이 들면서 감사함과 그리움이 가득 차오른다.
물론 음악, 미술, 춤은 예술가에게는 끊임없는 분석과 훈련의 결과물이지만, 감상자에게는 직관적으로 느끼고 온전히 경험할 수 있는 즐거움이 된다.
그리고 피아노를 연주하거나 춤을 출 때조차, 순간만큼은 머리로 계산하기보다 몸이 먼저 반응하며, 분석보다는 경험이 앞서기도 한다.
바로 이 ‘경험의 즐거움’이야말로 예술이 우리에게 꼭 필요한 이유가 아닐까 싶다.
남편은 딸에게 종종 이야기한다.
“정신적으로 힘들 땐 운동만큼 좋은 게 없어.”
그럴 때면, 나에게 피아노의 의미를 이야기해 주시며 배우기를 권하셨던 아빠가 떠오른다.
우리 딸도 나처럼,
남편의 그런 말을 마음 한켠에 간직해 두었다가
아주 먼 훗날, 고마운 마음으로 꺼내볼 수 있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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