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광 없는 밀라노에서 만난 나
밀라노는 사실 큰 기대가 없던 도시였다. 스페인으로 넘어가는 길에 잠시 들른 경유지 같았다. 관광지도 마음에 끌리지 않았고, 그냥 쉬다 가는 기분으로 머물렀다.
에어비앤비 숙소는 지하실 방이었다. 처음엔 아늑하고 괜찮아 보였는데, 곧 빨래가 마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해가 들지 않으니 옷은 축축했고, 답답했다. 결국 헤어드라이기를 가져와 옷을 말리기 시작했다.
드르륵― 소리가 지하에 울려 퍼지는 순간, 호스트가 내려와 말했다. “무슨 일 있어?” 나는 얼른 전원을 껐다. 호스트가 올라가자마자 다시 켜봤는데, 이번엔 ‘딸깍’ 소리만 나고 바람이 안 나왔다. 눈이 마주쳤고, 나는 순간 얼어붙었다. 다행히 다시 버튼을 누르니 작동하긴 했지만, 겁이 나서 그만뒀다. 옷은 덜 마른 채로 가방에 들어갔다. 밀라노에서의 첫 기억은 그렇게 얼떨떨하고 우스꽝스럽게 시작됐다.
마지막 밤, 이 도시에서는 딱히 한 것도 없어서 식사에 비용을 좀 투자해보자 싶었다. 그래서 구글에서 찾은 고급 레스토랑에 들어갔다. 립 갈비와 레드 와인을 주문했다. 혼자 갈비를 썰고 와인을 마시는 모습은 우습게 보일 수도 있다. 그런데 그 순간만큼은 정말 기뻤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교실 안에서 지쳐 있던 내가, 지금은 이탈리아 밀라노의 레스토랑에서 혼자 와인을 들고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상상도 못 했던 일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걸 느끼는 순간, 현실과 비현실이 뒤섞이는 묘한 감각이었다.
‘나 고생했구나. 잘했구나. 여기까지 왔구나.’ 속으로 계속 되뇌었다. 가슴이 벅차올랐고, 눈물이 차오를 만큼 울컥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기쁨은 동시에 외로움으로 번졌다. 주변을 보면 다들 누군가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나는 이렇게 큰 행복을 함께 느낄 사람이 없다는 것. 육즙이 터지고 와인의 향이 퍼질수록, 마음은 벅차고 또 공허했다. 기쁨과 외로움이 같은 자리에서 공존한다는 게 이상했지만, 그게 내 진짜 감정이었다.
여행은 어느덧 26일째. 관광지는 다 비슷해 보였다. 누가 꼭 가봐야 한다는 명소에 이끌려 다니는 것도 점점 귀찮아졌다. 그때 마음속에서 물음이 올라왔다. “왜 나는 늘 남의 시선을 따라 끌려다니고 있지?” 그러자 고등학교 시절이 떠올랐다. 그땐 남들의 기준으로만 살아서 늘 힘들고 불평만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돌아보니, 그 시절조차 얼마나 값지고 아름다운 순간이었는지 알게 되었다.
지금도 다르지 않다. 오늘이 힘들고 시시해 보여도, 언젠가 돌아보면 이 순간조차 값진 빛을 띨 것이다. 결국 답은 장소나 대상이 아니라, 내 안의 세계에 있었다. 외부가 어떻게 변하든, 내가 나를 아끼고 받아들이는 것. 기쁨이든 외로움이든 억누르지 않고 있는 그대로 느끼고 음미하는 것.
밀라노의 립 갈비와 와인은 단순한 식사가 아니었다. 나를 향한 작은 위로이자 다짐이었다. 어디에 있든, 결국 중요한 건 나 자신을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힘이라는 걸.
뭐, 이 깨달음을 립 갈비와 레드 와인 앞에서 얻었다는 게 조금 웃기긴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