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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혜원 Apr 08. 2023

그토록 다정한 눈빛이라니

친구야 고마워


34년 만의 만남이었다. 영숙은 내가 서울로 전학을 오고도 늘 궁금해하던 친구였다. 유치원 때부터 알게 되었고 등굣길에 많은 시간을 함께 했던 친구다. 영숙은 어렸을 때 소아마비에 걸려 다리가 불편했다. 집에서는 엎드리거나 엉덩이를 움직이며 이동을 했다. 밖에서는 짧은 다리에 기구를 장착하고도 많이 절뚝거려서 혼자 걷기가 어려웠다. 학교를 갈 때면 영숙이가 손을 짚을 수 있도록 한쪽 어깨를 빌려주고 가방도 들어줘야 했다. 영숙이와는 4학년 때 같은 반이 되면서 성희와 함께 영숙이 집에서 만나 같이 학교를 다녔다. 등교하는 길에 나와 성희는 어깨를 빌려주거나 가방을 들어주는 역할을 교대로 했다. 


처음에는 영숙이네 집이 학교 가는 길에 있었고 친구가 몸이 불편하니까 같이 가야겠다는 생각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것이 하나의 의무처럼 되자 마음에 부담이 되었다. 어떤 날은 혼자서 편하게 가고 싶기도 했다. 영숙의 불편한 다리의 약한 힘만큼 내 어깨에 힘을 주어 의지하는 것이기에 어깨가 아프기도 했다. 내가 함께하지 않으면 나보다 더 작고 마른 성희가 혼자서 가방까지 들어야 하니 꾀를 내기도 어려웠다. 아무도 강요하지 않았지만 시작한 일이었으니 어찌해야 할지는 순전히 내 마음에 달렸었다. 가끔은 빠트리기도 했지만 같은 반이던 1년간은 셋이서 거의 같이 학교를 다녔다. 학교 가는 길에는 전날 놀았던 이야기, TV에서 봤던 타잔이나 하이디, 선화공주 등의 만화영화 얘기도 하며 즐거웠다. 


 우리 동네에는 영숙이처럼 소아마비에 걸려 다리가 불편한 아이가 둘 더 있었다. 영숙은 다리가 불편해도 학교를 다녔지만 다른 두 명은 다니지 않고 집에만 있었다. 심부름을 갔다가 열린 방문 틈으로 어쩌다 얼굴이 보일 때면 그 아이들의 얼굴은 햇빛을 받지 못해 백지장처럼 창백했다. 엄마에게 왜 그 아이들이 학교에 다니지 않는지 물었지만 엄마도 시원한 답을 주지 못했다. 각 가정의 사정이 다르기에 학교를 보내지 못할 상황들이 있었을 것이다. 이런 분위기에서 영숙의 부모님은 딸을 학교에 보내 친구들과 어울리게 하고 어려움에 직면하면서 이겨나갈 수 있는 방법을 찾게 하신 것은 참 현명한 판단이었다고 느껴진다. 


영숙이는 공부도 곧잘 하는 아이여서 고등학교는 어느 도시의 학교로 진학했는지 궁금했다. 결혼 적령기 때는 다른 누구보다 결혼을 잘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는데 고향 동창 종희와 결혼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종희는 어렸을 때 내 절친의 앞집 사는 아이였기에 그 아이의 얼굴과 이름은 알고 있었다. 말은 한 번도 건네보지 못했지만 남자아이 치고 얼굴이 유난히 희었던 기억이 있다. 종희는 할머니도 함께 살았는데 할머니의 발이 기형이었다. 발가락에서 발바닥의 아치가 시작되는 부분까지만 땅에 닿고 그 뒷부분은 들려있어서 신발을 신을 수가 없으셨다. 뒤꿈치를 높이 들고 걸음을 걸어야 하니 늘 맨발로 다니셨다. 그래서 동네의 어른들도 아이들도 닭발 할머니라고 불렀다. 지금도 깊은 주름의 온화한 할머니의 얼굴이 생각난다.  


유치원 소풍(청송해변)


드디어 대전에 사는 영숙이가 부천 친정집에 다녀가야 한다고 해서 만날 날을 약속했다. 남편과 함께 나오겠다고 해서 당연한 얘기라고 하며 친구가 먼 걸음을 하지 않도록 내가 친정집 근처로 갔다. 오랜만이었지만 우리는 서로의 얼굴에서 어릴 적 모습을 찾아내고 너무 반가워했다. 친구의 남편이 된 종희와는 처음 얘기를 나누는 사이였지만 늘 얘기를 나눠온 것처럼 너무도 자연스럽게 얘기가 술술 나왔다. 수줍은 성격이라고 생각했던 종희는 유머도 있고 능청스러움도 있었다. 사춘기 때는 내외하면서 서로 말을 건네지도 못했는데 어른이 되니 편한 점이었다.





영숙은 그동안 여러 번 수술해서 다리에 장치가 없이도 혼자서 걸을 수 있었다. 결혼한 후에도 계속 수술받아가며 딸 셋을 낳아 기르는 강한 사람이었다. 종희의 영숙에 대한 깊은 사랑의 힘 덕분이기도 했다. 얘기하는 중에 군 사택에 살 때 좁은 길을 걸을 때면 남편이 자주 업고 걸었던 기억을 꺼냈다. 그 상황을 회상하면서 얘기를 나누는데 종희가 미소 띤 얼굴로 영숙을 바라보는 눈빛이 참으로 따스하고 다정했다. 종희가 정말 따뜻하고 사랑이 많은 사람이라는 것이 느껴졌다. 서로 마음을 깊게 나누고 사는 친구 부부를 보면서 뭉클한 감동이 일었다. 어떤 명예나 부를 안겨 준다 한들 사랑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종희가 멋진 남자라는 생각과 함께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헤어지면서 영숙에게 한번 안아 보자며 건강 관리 잘하라고 당부하며 등을 토닥여줬다. 종희에게는 “만나서 반갑고 고맙다”라고 인사를 했다. 내 친구를 진정으로 위해주는 종희가 정말 고마웠기 때문이다. 종희가 PX에서 사 왔다며 맥주 한 상자를 차에 실어주어 기쁘게 받았다. 영숙을 만나러 가는 길에  '영숙이 다리가 불편하지 않았으면 결혼할 자리는 아니었는데...'라는 생각을 했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내가 얼마나 저속한 인간인지 깨닫고 부끄러웠다. 


이후 영숙을 만나지 못하고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예전처럼 안쓰러운 마음을 가지고 영숙을 생각하지는 않는다. 어려운 시기를 함께 이겨내고 서로 다정한 눈빛을 주고받으며 행복해하는 모습을 봤기 때문일 것이다. 이따금 영숙을 생각할 때면 학교 다닐 때의 우리가 아닌 부부가 나란히 앉아 눈빛을 주고받으며 다정하게 얘기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내가 보아온 부부들 중에서 가장 행복하고 아름다운 부부의 모습이었다. 참으로 안심되고 고마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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