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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혜원 Jun 18. 2023

당신의 길 위에서

두 사람


백설의 들판을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걷는 두 사람. 설원에 찍히는 내 선명한 발자국을 보기 위해 뒷걸음으로 걷던 일. 종아리까지 푹푹 빠지는 눈밭에서도 아무도 걷지 않은 길을 걷기 위해 논을 가로지르던 일. 밝은 달이 비추는 인적 없는 들판에서 목놓아 시를 읊던 일. 겨울에 하얀 눈이 쌓인 들판을 보면 마음이 고요하고 평화로우면서 그림 같은 몇 컷의 풍경이 떠오른다.

 

아빠 농장에 가는 주말에는 토요일 수업이 끝나고 집에 들러 편안한 옷차림으로 갈아입고 책을 한 권 챙겼다. 시외버스 정류장에서 내리면 걸어서 1시간 거리에 농장이 있었다. 정류장부터는 큰 마을이 있고 그 마을이 끝나는 지점에 있는 하천의 다리를 건너면 너른 김포평야가 펼쳐졌다. 농장에 사는 사람들은 들어가는 길에 차를 만나면 얻어 타기도 했지만 나는 여동생과 함께 걷는 것을 좋아했다. 사람들의 인정이 넘치는 때라 차를 세우기도 전에 농장에 가는 길이면 태워주겠다고도 했지만 정중하게 사양했다. 차 안의 갇힌 공간에서는 밖을 잘 볼 수도 없었고 태워준 분의 묻는 말에 형식적인 답을 하다 보면 그 시간에 무언가를 놓친 것 같았다. 

 

논이 보이는 곳에서부터 45분 정도 걷는 길은 사시사철 다른 얼굴의 들판을 보여주기 때문에 전혀 지루함을 느낄 수 없었다. 해 질 녘 서쪽 하늘에 그린 형언할 수 없이 아름다운 노을의 변주. 노을을 받아 짧은 시간 동안 다채로운 색을 입는 들판. 겨울이 지나면 들판에 불을 놓아 매캐한 냄새와 함께 피어오르는 연기. 모내기 후 물에 잠긴 아직은 작은 키의 여린 초록 벼들이 가벼운 바람에도 나부끼며 경쾌하게 춤추는 모습. 가을이면 온통 황금빛 옷을 입고 고개를 떨구고 있는 벼들. 추수가 끝나면 마을 입구부터 색색의 돗자리에 나락 알갱이들이 널려있던 좁은 길들. 추수 후 논들은 황토색 속살을 드러낸 채 하얀 눈을 맞을 준비를 했다. 

 

                                                              © jplenio, 출처 Pixabay


아빠에게 가는 길에서 만난 다양한 모습의 자연은 나를 다른 차원으로 인도했다. 그 길은 세상의 근심과 걱정을 완전히 잊게 하는 묘약이었다. 자연으로부터 얻은 감성은 국내외의 애달프고 아름다운 시를 나와 연결시켰다. 그때부터 긴 시간 걸으면서 낭송할 시들을 외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교과서에 나와 익숙한 김소월, 김남조, 윤동주, 유치환 등의 시에서 출발했다.


그리움/유치환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임은 물같이 까딱 않는데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날 어쩌란 말이냐



거센 파도와 같은 그리움이 밀려오면 파도가 바위에 부서지며 스러지는 것처럼 내 그리움이 사멸하기를 바라며 시를 읊었다. 별이 있는 밤에는 윤동주의 <별 헤는 밤>을 감정을 듬뿍 넣어 낭송했다. 학교 도서관에서 시를 읽으며 윌리엄 워즈워스, 기욤 아폴리네르, 하이네 등을 만났다. 겨울은 특별히 더 시심이 이는 계절이었다. 길이 아닌 곳에 길을 내며 눈 덮인 허허벌판의 무대에서 주인공이 되어 이들의 시를 낭송하며 걸었다. 



                                                 © pwittke, 출처 Unsplash



그대가 보낸 편지/하이네


그대가 보내 주신 편지에

나는 전혀 마음 슬퍼하지 않겠소.

그대는 이제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했지만,

그러나 그 편지는 너무나 길었습니다.


열두 장이 넘도록 오밀조밀하게 쓰신!

이 정성스러운 글씨를!

만약 그대가 이별을 원한다면

이토록 상세하게 쓰실 수는 없는 것을.



사랑하지 않는다며 이별을 고하는 기나긴 편지에 상대가 아직도 사랑하고 있음을 느끼는 화자.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이 다치지 않도록 이별해야 하는 상세한 이유를 썼을 사려 깊은 사람을 아파하며 시를 낭송했다. 미지의 사랑하는 이를 상상하며 기욤 아뽈리네르의 <선물>을 낭송했다. 동생과 시를 주고받으며 걸었던 그 길은 아빠가 꿈을 실현하신 길이었다. 그 길 위에서의 시간은 내 삶에서 가장 중요한 감성이라는 자산을 얻은 시기이기도 했다. 아빠의 길은 그렇게 아무도 모르게 나를 나 자신에게로 인도해주고 있었다.



대문사진 출처: © Lichtmagnet, 출처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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