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서부터 무엇을 말할까. 예컨대 '멜론 Top 100'을 듣는 사람과 스스로 만든 재생목록을 듣는 사람을 각각 생각했다. 스스로 후자가 되기를 원하는 쪽이지만 한쪽은 취향이 없는 사람이고 한쪽은 취향으로 가득한 사람이라고 생각지는 않는 편이다. 그런 생각을 하다 이어서, 듣는 사람 대신 그들이 듣는 곡 자체를 생각했다. Top 100에 이름을 올리는 곡이라는 건 그만큼 그것을 듣는 이들이 많다는 의미고 거기에는 그 곡을 하루에 한두 번 듣는 사람과 아침에 일어나서부터 잠들 때까지 듣는 사람이 모두 있다.
어떤 사람은 좋아하는 곡의 뮤직비디오 속 모든 장면과 그 세부를 빠짐없이 기억하며 어떤 사람은 휴가를 내고 좋아하는 아티스트의 콘서트에 간다. 어떤 사람은 아직 데뷔하지 못한 다년차 연습생의 생일선물을 정성스럽게 준비한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좋아하는 아티스트가 주인공인 소설, 팬픽을 쓴다. 대단한 것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냥 하고 싶어서 하는 이야기. 그런 이야기를 쓴다는 건 결과물이 아니라 과정 자체를 쓰는 일이다.
"그날로부터 8년이 흘렀다. 스물세살이 된 다인은 아이돌 걸그룹 제로캐럿의 멤버로 첫 단독 콘서트를 아홉시간 앞두고 있었다. 데뷔 5주년을 기념하는 콘서트였다. 콘서트 오프닝 무대에서 다인은 이 춤을 출 것이다. 그리고 정말 마지막이다. 더이상은 추지 않을 것이다. 절대로. 다인은 다짐했다. '나는 이 결정을 선택했다'고."
(8쪽)
소설 『라스트 러브』(2019, 창비)는 5년 차 아이돌 그룹 '제로캐럿'을 중심으로 한 중편과 '파인캐럿'이라는 닉네임을 쓰는 제로캐럿의 팬이 쓴 일곱편의 팬픽을 교차한다. 그 팬픽들은 각각 f(x), 트와이스, 태연, 오마이걸, 아이유, 여자친구, 러블리즈의 노래 제목을 딴 단편이다. "일곱편의 팬픽 속 인물 중 누구도 자신과 타인의 성적 지향을 질문하거나 그 사실 때문에 현실 세계와 불화하지 않는"다. (188쪽, 소설가 천희란의 발문 중) 이 세계는 누구에게도 '너는 왜 그런 사람을 좋아하냐'라고 묻지 않는 세계다. 그런 세계가 있다.
"그렇게 외쳐야만 한다고 믿었던 사랑. 그런 사랑들."
(167쪽)
『라스트 러브』에서 오직 중요한 건 무대 위의 아이돌을 온 진심을 다해 사랑하고 아끼는 감정과 그 마음을 누군가와 함께 나눈다는 연대감이다. 해체를 앞둔 5년 차 아이돌의 처음이자 마지막 단독 콘서트를 아홉 시간 앞두고 『라스트 러브』는 멤버들 각각의 내면과 그들의 팬인 파인캐럿의 마음과 시선을 오가며 오직 표현해야만 알아질 수 있는 종류의 사랑을 소설이 가장 잘할 수 있는 방식으로 생생히 보여준다.
"그동안 내가 바라보았던 무대 위의 사람들을 떠올려본다. 그 빛나는 재능과 남다른 매력을. 지나가버릴 것이 분명한 순간들을 함께하고 있다고 믿었던 애틋한 마음을. 내가 목격한 찬란함을 증언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던 절실함을. 그 마음을 간직하고 오래도록 바라보는 일에 대해 생각한다. 그리고 쓰고 싶다. 계속."
(195쪽, '작가의 말'에서)
9시간이라는 시간적 서술 범위 내에는 5년의 또 다른 시간이 있고, 제로캐럿 멤버들의 5년과 그들이 데뷔하기 전의 수많은 시간들은 물론 파인캐럿을 비롯한 모든 팬들의 5년이 모두 있다. 처음 소설을 펼치며 작가의 말을 읽는 순간 이미 이 소설을 좋아하게 될 것임을 확신했고, 읽고 또 읽는 동안 한 번도 들어본 적 없고 책 바깥에 존재하지도 않는 제로캐럿의 스물일곱 곡이라는 디스코그래피를 함께한 기분이었다. 몇 번을 더 읽느라 이제야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