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하나 기억을 떠올리며 글을 쓰는 동안 나는 자주 흐뭇했다. 점점 안심이 됐다. 끔찍했던 기억은 여전히 끔찍했고, 행복했던 기억은 여전히 행복했다. 놀랍게도 그 안에는 크고 작은 의미가 숨어 있었다. 그때의 내가 없었다면, 지금의 용기 있는 내가 없었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 힘들었던 지난날에도 벅차오르는 순간들이 곳곳에 스며 있었음을 인정한다. 결코 스쳐 지나간 정류장이 아니었다. 멈춰선 자리마다 꽃이 흐드러졌고 열매가 영글었다."
(김선영, 『오늘 서강대교가 무너지면 좋겠다』에서)
김선영 작가님의 책 '오늘 서강대교가 무너지면 좋겠다'
주어진 순간 앞에 성의를 다한 사람이 마주할 수 있는 특권 같은 것이 있다고 믿으면 여전히 불확실한 오늘이 나름대로 나쁘지만은 않은 것이 되는 것 같다. 평생직장의 개념이 사라졌다고 해서 일하는 마음이 '언제든 그만둘 수 있는' 마음이 되고 출근하는 마음이 '언제든 떠날 수 있다는' 마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지는 않는 편이다. 어떤 순간에는, 출근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이 감사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그건 망연했던 날들을 떠올릴 때 더 그렇다.
퇴사 후 막막한 내일 앞에 한 숨 잠도 이루지 못했던 날. 출근하기로 한 전날 또 불확실한 내일 앞에 뜬 눈으로 천장만 바라봤던 날. 그러고는 막상 다음날이 되자 또 아무렇지 않게 혹은 어영부영 혹은 어쩌다 보니 보낼 수 있었던 하루들. 그런 괜찮은 하루들 사이에 가끔 들어가 있는, '내일 출근 안 해도 됐으면 좋겠다' 싶은 생각이라든가 '이건 아니다' 싶었던 생각이라든가. 그 순간들의 상당 부분은 가볍게 휘발되어버리고는 드문드문 과정과 사이들만이 남는다. 다시 한번 얼마 전 끼적였던 '워크 앤 라이프 하모니'에 대해 생각한다. 밸런스 아니고 하모니.
'이번 봄이 제법 괜찮은 계절이 될 것 같다'라고 생각했던 시간들을 지나 '이번 여름은 어떤 계절이 될까' 생각하는 시간들을 맞이하고 있다. 앞으로도, <컨택트>(2016)의 루이스처럼 '모든 순간들을 기쁘게 맞이할' 수 있는 단단함을 길러야겠다고 생각한다. 아마도 내일 서울교는 무너지지 않을 것이고 영등포고가차도도 멀쩡할 것이기 때문이다. (2020.05.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