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동진 Jun 16. 2020

도무지 맺어지지 않고 계속
일어나기만 하는 이야기

소설 『걸어도 걸어도』(민음사, 2017)

점심을 혼자 먹게 되거나 혼자 먹기를 자청하는 날이 있다. 보통 노트북이나 태블릿을 들고 나와 글 쓰거나 자료 검색을 했지만, 최근에는 계속해서 책 한 권씩을 들고 다니고 있다. 영화도 몇 번을 봤고 책도 이미 읽었지만, 요즘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자신의 영화를 소설로 옮긴 『걸어도 걸어도』(민음사, 2017)를 다시 천천히 읽었다.


소설 '걸어도 걸어도'(민음사, 2017)

『걸어도 걸어도』는 당시에는 몰랐거나 생각하지 못했지만 지나고 난 뒤에야 비로소 깨닫는 일들로 가득하다. 자전적인 감정을 바탕으로 쓰인 작품인 데다 감독의 평소 습관화된 일상의 세부 관찰과 관조로 만들어진 이 이야기는 발단에서부터 결말에 이르는 갈등의 5막 전개 구조도, 기승전결의 흐름도 뚜렷하게 있지 않다. 그렇기에 더 생생하고 활력 있으면서 감정을 애써 드러내지 않고도 차분하게 전달해낸다.


수백 칸으로 이루어진 계단을 오르거나 내리는 일은 결국 첫 번째 칸부터 마지막 칸에 이르는 한 계단씩의 순서로 구성된다. 두 칸 세 칸씩은 옮길 수 있어도 전혀 다른 위치에 있을 수는 없고 오직 일정한 단계를 밟아야 하는 일. 작중 계단이 상징적이고도 중요한 의미로 쓰이는 것처럼 『걸어도 걸어도』가 사람의 이야기를 다루는 방식은 글자 그대로 '걷는 듯 천천히'일 것이다. 특별하지 않은 순간들이 일상을 채우고 도드라지지 않는 일상들이 삶을 만들어간다는 이야기를, 작품이 시작되기 전부터 그래왔고 작품이 끝난 후에도 계속해서 살아있을 것 같은 인물들이 하나씩 꺼낸다.


177쪽


사소하고 평범한 순간들로 채워지는 게 인생이라고 말하는 걸작이 이것만 있지는 않을 것이지만, 회한과 유머, 쓸쓸함과 즐거움, 기대와 실망, 작은 온기, 그리고 특정 단어 몇 개로 축약할 수 없는 감정들을 이렇게 담은 작품은 거의 없다. 작디작은 순간들을 하나씩 들춰내며 끝난 듯이 도무지 끝나지 않는 여진을 남기는 『걸어도 걸어도』가 영화보다도 소설판이 더 생생하게 다가오는 건 영화와 달리 화자가 미래 시점에서 과거를 회상하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이 아름다움과 깊이는 몇 년이 지나도 더 무르익어가기만 할 것이다.


영화 '걸어도 걸어도' 중에서


"아버지도 어머니도 일흔을 넘겼지만, 아직 그때는 건강하실 때였다. 언젠가 그분들이 먼저 돌아가시리라는 것은 물론 알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언젠가'였다. 구체적으로 내가 아버지와 어머니를 잃는 상황을 상상하지는 못했다. 그날, 무언가 결정적인 사건이 일어났던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수면 아래에서는 여러 가지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했고, 나는 이를 눈치채고 있었다. 그럼에도 모른 척했다. 나중에 분명히 깨달았을 때는, 내 인생의 페이지가 상당히 넘어간 후라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때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이미 돌아가신 뒤였기 때문이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걸어도 걸어도』, 박명진 옮김, 민음사, 2017, 10쪽.



인스타그램: @cosmos__j

그 외 모임/클래스 공지: lnk.bio/cosmos__j

매거진의 이전글 오늘 여의도는 무너지지 않는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