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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진 Feb 27. 2016

드러내지 않고 굽힐 줄 아는 것

홍보대행사. 갑이 정한 의무를 을은 성실히 수행할 것. 일종의 '시킨 일'을 해야 하고 경우에 따라 '시키는 일'을 하기도 한다. 대행사이기에 어쩔 수 없이도 가장 잃어버리거나 잊어버리기 쉬운 것은 자신이 어떠한 일을 하고 있다는 직업 의식이나 주인 의식과 같은 것들. 힘들여 일하면서도 하위 구성원 개인의 이름이 대외적으로 드러나는 일이 아니기에, 고생에 대한 보상은 적을 수 있는 데 비해 목표한 만큼의 성과나 성취감이 따라주지 않을 때 그 고충은 배가 된다. 어쩔 수 없이 싫은 소리도 들을 수 있어야 하고, 일의 특성상 숙이거나 저자세로 강대를 대해야 할 일이 많다.


그럼에도 이 일을 지탱하게 해주는 것은, 일반인은 결코 알 수 없는, 영화의 홍보와 개봉 준비 과정에 깊숙하게 관여하고 있다는 자부심과 나의 손길이 담긴 영화가 극장에서, 극장 밖에서 대중들에게 전해지는 과정과 그 모습을 지켜보는 일. 그런 것들이다. 그러다 보면 내 돈 주고 볼 일은 없겠다 싶을 정도의 내 관심 밖의 영화도 짧게는 몇 주에서 길게는 몇 달의 시간을 거치며 신기하게도 어떤 애착 같은 게 생기기도 한다. 전화나 문자, 이메일을 주고 받을 때 자연스레 '우리 영화', '저희 영화' 같은 표현이 입과 손에 착 붙어서일까. 그리고 늘어가는 건 각종 뉴스나 방송 프로그램의 기자나 작가들의 이름과 쌓여가는 명함들. 여러 영화 관련 행사들을 보면서 자연스레 나오는 견적(?) 같은 것들.


불과 몇 개월 사이 많은 사람들을 거쳐가고 또 새로운 얼굴을 만나고 그런 과정을 되풀이한다. 짧은 시간 이 일을 하며 알게 된 이들이 긴 시간이 지나고 나서는 어떤 모습으로 무엇을 하고 있을까, 그들은 무슨 생각과 뜻으로 나와 같거나 비슷한 일을 해왔고 또 하고 있을까. 사무실을 일찍 나설 때도, 늦게 나설 때도 저녁은 여전히 저녁에 있다. 다음 주에 날이 밝으면 사무실에 새로운 식구가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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