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고의 순한맛과 매운맛' 시즌 1을 읽었다
글을 좀 쓰는 사람들은 아마도 알 것이다. 내 글을 쓰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다른 사람의 글을 읽을 시간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는 걸. 메일함에 미처 다 읽지 못한 채 쌓여가는 갖가지 뉴스레터들을 보다 보면, 글 읽는 두뇌가 두 개쯤 더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될 때도 있다. 좋아하는 것들, 유용한 것들, 계속해서 읽고 싶은 것들이 세상에는 가득하고, 내가 쓰는 [1인분 영화] 역시 구독자는 많지 않지만 누군가에게는 그런 것일 수 있다면 좋겠다 생각한다.
합정역 인근에 '문학살롱 초고'(이하 '초고')라는 곳이 있다. 서점이지만 음료와 주류를 판매한다. (현대카드 트래블 라이브러리에는 초고의 2호점도 있다.) 전부터 알고는 있었지만 걸음하기 시작한 것이 그렇게 오래되지는 않았는데, 공간에 대한 애정도는 시간에 정비례하지만은 않는다. 퇴근길에는 자연스럽게 합정으로 향했고, 긴 글을 쓰고 싶을 때도 합정으로 향했다. '초고'에서는 그렇게 내 여러 초고들이 탄생했다.
최근, 그러니까 얼마 전까지 사회적 거리두기 단계가 격상돼 작은 카페와 동네서점 등 자영업/소상공인들이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음을 알고 있었고, '초고' 역시 예외는 아니었을 것이다. 인스타그램에 어느날 이런 공지가 올라왔다. (...) "코로나가 장기화되며 임대료를 못 낼 위기에 처했습니다. 네 명의 식구를 둔 가장으로서 손 놓고 있을 수 없어 연재 노동을 시작합니다." (...) 마냥 상황이 진전되기만을 기다릴 수 없었던 사장님은 구독자를 받아 원고료를 대가로 이메일로 글을 발행하는 <초고의 순한맛과 매운맛>이란 이름의 연재를 그렇게 시작했다.
[1인분 영화]를 비롯해 내 글을 쓰는 것과 몇몇 모임/강의 준비에도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하고 이미 구독 중인 몇 개의 뉴스레터들, 읽을 책들(이건 언제나 있지만)을 생각하면 새로 무언가를 구독하는 건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었지만, '초고'가 거기 그 자리에 오래 있어주었으면 하는 마음은 자연스럽게 구독 신청과 구독료 입금으로 손을 움직이고 있었다.
(...) "마지막 손님이 책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서려 할 때, 카운터 뒤에서 인사를 고민하며 문득 그 말을 떠올렸다. 언제 한번 밥 먹자는 말도, 초고에서 보자는 말도 아닌, 살다가 보자, 라니. 다음을 기약하면서도 지키지 못할 약속을 만들지 않는 태도가 근사하다. Mañana See you를 한국어로 의역하면 “살다가 봐요”가 아닐까. 카운터로 다가오는 손님을 보며 속으로 중얼거린다. 살아 있기만 해도 다행인 세상이니까요. 잘 살아 있어요. 살다가 만나요." (...)
(9월 4일, '순한맛 - 코로나 시대의 인사법'에서)
(...) "저는 오지 않는 기회를 그렇게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아요.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버티면 좋아지겠지, 하면서요. 이미 버스는 지나가 버린 지 오래예요. 돌아갈 수 없어요. 제때 졸업을 하고, 어찌저찌 취업을 하고, 작은 돈이나마 차곡차곡 모으고, 그렇게 생의 계단을 차근차근 오르는 친구들을 보면 지금까지의 선택들이 잘못되었다고 느껴요. 없을지도 모르는 희망을 좇느라 많은 시간과 돈을 허비해버렸어요. 사실 인생 길게 보면 그렇게 긴 시간도 아닐 텐데, 너무 아깝게 느껴지는 거 있죠." (...)
(10월 8일, '매운맛 - 건물주 선생님께'에서)
일정 빈도와 양 이상의 글을 쓰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선택의 기로가 하나 있다. 쓰는 시간과 읽는 시간. 많이 쓸수록 다른 사람의 글을 꺼내 읽을 시간은 점점 더 줄어들어서 욕심과 선호와 뜻과 달리 그것들은 물리적으로 후순위의 것이 된다. 그럼에도 첫 번째 <초고의 순한 맛과 매운 맛>은 메일을 받는 자정 무렵의 시간을 손꼽아 기다렸고, 받자마자 메일을 열어 정독했다. 평소 메일 앱의 알림을 꺼놓고 그냥 수시로 확인하는 편인데, <초순매>를 읽는다는 것은 메일함에 알림을 켜놓을 이유가 되었다.
이메일은 물론 메일 서버 어딘가에서 수신인과 발신인 사이를 떠도는 것과도 같지만, <초순매>를 읽는 순간만큼은 조금 다르게 표현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영혼까지 끌어모아 월세 낸다'로 시작된 이 첫 번째 시즌이 나날이 오래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들이 메일함에 쌓이는 [초순매 / 순한맛]과 [초순매 / 매운맛]과 [초순매 / 초고 사람들]을 읽는 내내 떠나지 않았다. 어떤 이야기는 단지 거기 있어주는 것만으로 가치 있는 존재가 되고, 어떤 이야기는 나만 알고 싶은 동시에 더 많은 이들에게 이야기해주고 싶은 것이 된다.
초고의 '유능하고 사랑스러운 친구들'의 원고를 읽는 월, 수, 금요일은 내 [1인분 영화]를 쓰는 요일이기도 했다. 세상 어딘가에서는 지금도 동시에 어떤 것들이 쓰이고 있지만, 어딘가가 아닌 바로 그곳에서 누군가 마감을 앞두고 노트북 앞에 앉아 있을 것임을 아는 일은 다른 여기에서 스스로의 것을 쓰는 내게도 작은 응원 같은 것으로 다가오기도 했다. 그래서, "잘 쉬고 시즌 2로 돌아오겠습니다. 아직 갚아야 할 빚이 많거든요."(10월 11일, '연재를 마치며'에서)라는 문장에 엷게 미소를 지어보게 되었다. 이것을 계속 읽을 수 있구나 하는 생각에. (2020.10.11.)
p.s. <초고의 순한맛과 매운맛>의 시즌 2 연재를 앞두고, 시즌 1의 과월호 구독자도 모집한다는 반가운 공지가 올라왔다. 여기에도 링크해둔다!
https://www.instagram.com/p/CGPP3QvFnGa/
씨네엔드 월간영화인 - 10월 이안 감독 편(2회차 '라이프 오브 파이'):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