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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진 Nov 29. 2020

'내언니전지현과 나'와 나

거기 끝 모를 세계가 끝없이 있었다

블레오, 스페셜포스,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시아, 4LEAF(주사위의 잔영), 던전 앤 파이터. (스타크래프트나 워크래프트 3 등 PC 패키지 게임은 제외하고) 생각나는 이름들만 몇 개 적어봐도 게임이 한때 삶의 얼마나 큰 부분이었는지를 스스로 느끼게 된다. 그것들은 다 어디로 갔나. 서비스 종료의 순간을 맞이했던 경우도 있지만 내가 플레이했던 게임들이 다 '망한 게임'만 있는 건 아니었다. <내언니전지현과 나>(2019)의 대목 중에는 '일랜시아가 없어진다면'이라는 물음을 길드원들에게 건네는 장면이 있다. 누군가는 아쉽지만 슬프지는 않을 것 같다고 하고 또 누군가는 부흥은 다시 못 하겠지만 사라지진 않았으면 좋겠다고 하고 또 누군가는 상상해본 적이 없어 잘 모르겠다고 한다.


영화 '내언니전지현과 나' 스틸컷


모든 일에는 흥망성쇠가 있어서 그건 그것대로 모르지는 않는 것이지만, 그때의 마음만큼은 영원할 것처럼 믿는 것들로만 가득했다. '앞으로 그런 날이 온다고 해도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게 그때는 더 중요했고 그와 바꿀 수 있는 건 없었다. 방과 후, 잠들기 전, 일어나서, 밥 먹고 나서. 야간 자율학습을 빠지고 PC방에 가는 일에도 이유 같은 것이 있지는 않았다. 


가장 오랜 기간 했던 게임의 '부길마'였던 나는 그 게임이 정상의 인기에 있을 때 사적인 이유로 게임을 스스로 '접었'다. 무슨 대단하고 비장한 각오 같은 것이었을까 싶지만 지금 생각하면 굳이 그런 결심 같은 게 필요하진 않았을 것도 같다. 어쩌면 처음, '현실로 돌아가야겠다'라고 생각했던 때이기는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때의 순간들이 현실이 아닌 것이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누군가는 '그깟 게임이 뭐라고' 쯤 생각하겠지만 어떤 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 가상세계라고 해서 그 세부와 전체가 다 가짜가 되지는 않는다. 서버 어딘가와 마음속 어딘가에만 있는 것이라도 해도 그건 분명하고 선명했다.


영화 '내언니전지현과 나' 스틸컷


<레디 플레이어 원>(2018)에서도 그런 순수한 믿음을 간직한 개발자는 "고맙구나, 내 게임을 해줘서."라고 한다. <내언니전지현과 나>에서도 한 개발자는 오직 즐거움만으로 모든 것을 쏟아부었던 순간을 고백한다. 그들은 끝없는 세계의 창조자였고, 한 명의 사용자에 불과했을 이들도 결국은 자신들의 세계를 거기서 만들었다. 자신이 창조했지만 이제는 기억 속에서 희미해져 가고 있는 한 세계에 다른 누군가 여전히 남아 질문을 던지고 커뮤니티를 꾸려가고 있는 모습을 홀연하게 마주한 어떤 얼굴이, 영화를 두 번째로 보고 난 뒤 잊을 수 없이 남았다. 내게도 그런 세계가 있었다. 끝나지 않는 세계였다.


영화 '내언니전지현과 나' 스틸컷

<내언니전지현과 나>, 2020년 12월 3일 개봉, 86분, 12세 이상 관람가.



영화 <내언니전지현과 나>(2019)를 이해하기 위해 1999년 출시된 넥슨의 MMORPG 게임 '일랜시아'를 이해해야 할 필요는 거의 없다. 그럼에도 이 다큐멘터리는 16년 차 일랜시아 유저이자 길드마스터인 감독의 사적(이면서도 공적)인 질문에서 출발했다는 점에서 독보적인 특수성을 확보한다. 외부인의 호기심으로 시작된 취재라면 결코 이런 작품을 만들 수 없다는 이야기다. (그러니 좋은 이야기는 특수하면서 보편적일 수 있다.) 1990년대에 출시된 많은 게임들에 쓰인 화면비 1.33대 1은 35mm 필름 영화들의 그것을 닮았다. 어릴 때 '게임 좀 해 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그 시절이 어떤 것들로 채워지는지를. <내언니전지현과 나>는 그 모든 것을 담고 있다. 지난 7월 '인디다큐페스티발' 때 실은 이 영화를 이미 봤다. 12월 3일 개봉 예정인 정식 개봉판은 그때의 70분에서 16분이 추가된 86분이다. 이 16분은 단지 욕심이나 분량에 대한 의식이 아니라 필요하고 유효한 순간들로 가득 차 있다. 정확히 필요하면서 감정까지 고양시키는 이미지와 장면들. 몇 개월 만에 다시 만난 이 영화가 조금 더 좋아졌다. 게임이 아니더라도 영화, 드라마, 음악, 아티스트 등 특정한 대상이나 분야에 깊이 몰입하고 진심으로 애정을 쏟은 경험이 있다면, 혹은 온라인을 기반으로 형성되는 커뮤니티가 어떤 과정과 가치를 담는지 안다면 <내언니전지현과 나>의 이야기는 여러 차원과 층위의 순수하고도 가치 있는 결과물로 닿을 것이다. 이 영화를 모두 보셨으면 좋겠다.


11월 27일, 인디스페이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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