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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보다 '현망진창'이 되어도 괜찮아

만나지 않은 이야기를 믿는 일

by 김동진


며칠간 감상하고 소화했던 모든 콘텐츠들의 공통분모에는 현실 세계의 감각을 벗어나는 이야기가 있었다. 다르게 말하면 이 세계의 것이 아닌 어떤 것. 우다영 소설 『앨리스 앨리스 하고 부르면』, 영화 <몬스터 헌터>(2020), 드라마 [하백의 신부 2017](2017)까지. 「앨리스 앨리스 하고 부르면」의 화자는 꿈인지 아닌지 알기 힘든 어떤 섬에서의 경험을 하며 <몬스터 헌터>의 주인공은 폭풍 속에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괴생명체를 만난다. [하백의 신부 2017]의 주인공 역시 직접 경험하지 않고는 아무도 믿지 않을 일들을 내내 겪는다.


영주로 향하는 기차에서 읽은 문장 중에는 "내 상상력에는 판타지와 SF라는 방대한 영역과 한계가 반드시 필요하다. 외우주가, 그리고 내륙의 땅이, 지금도 앞으로도 언제나 나의 조국이 될 것이다."(어슐러 르 귄, 『밤의 언어』 )가 있었다. 서울로 돌아오는 기차에서 다시 읽은 김연수 소설 『사월의 미, 칠월의 솔』의 작가의 말에서 본 문장 하나는 새삼 같은 생각을 한 번 더 하게 했다. "이 책에 실린 소설들을 쓰는 동안, 나는 내가 쓰는 소설은 무조건 아름다워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실제 이 세상이 얼마나 잔인한 곳이든, 우리가 살아온 인생이 얼마나 끔찍하든 그런 건 내게 중요하지 않았다."


김연수 소설 '사뭘의 미, 칠월의 솔'


김연수의 문장답게 일부분만 인용해서는 그 느낌과 뜻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지만, 이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이야기를 만나는 일이 이 세계로부터의 도피만은 아닐 것이다. 영상 기술로 만들어진 허상의 것들에 마음을 빼앗기는 일이, 문자로만 존재하는 이야기에 상상력을 더하는 일이 아무 쓸모가 없는 걸까. 아니, 그렇다고 해도 그게 쉽게 사라지는 경험은 아니어서. 인생이 끔찍해서가 아니라 끊임없이 감정과 사고를 확장하기 위해 삶에는 이야기가 있어야 한다.



[하백의 신부 2017]의 '소아'(신세경)와 '하백'(남주혁) 이야기를 만나면서 그런 궁리를 하는 중이었다. 신계로 돌아갔던 '하백'은 인간계에 다시 찾아와 "제대로 이별하기 위해" 되돌아왔다고 한다. 이미 전부터 '소아'에게 일어나는 일들은 현실인지 꿈인지 알 수 없는 것 투성이었지만 그는 한 번 더 신계로부터 온 손에 자기 얼굴을 잠시 맡긴다. "현실 맞네." 그건 맞고 아니고를 따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순간을 제대로 경험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여기에는 현실 세계의 흐름과 논리, 맥락을 초월하는 어떤 것이 있다.


본가에서 드라마 [철인왕후](2020)를 보고 있었는데, 옆에서 같이 보던 엄마가 이리 재밌는 드라마가 있었냐고, 언제 하는 거냐고 물으시는 것이었다. 거기에는 보고 있는 회차가 15회였다는 것이나 앞뒤 상황이 어떤지가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다. [철인왕후]도 말하자면 '퓨전 사극'이어서 그 '퓨전'이라는 것이 걸림돌이 되기도 하지만, 이야기에 감응하는 일에 그리 많은 것이 필요하지는 않다.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현실인지 가상인지를 구분하는 일보다 이야기의 실리적 쓸모를 따지는 일보다, 아직 이 삶에 다가오지 않은 이야기가 있다는 사실 자체를 믿는 일이라면. 그건 '오늘만 붙잡는' 일이나 혹은 '오늘 같은 내일이 오지 않더라도 두려워하지 않는' 일과 다르지 않을 것 같다. 그게 게임이나 영화, 드라마가 끊임없이 존재하는 이유인 것 같고. (2021.02.14.)


tvN 드라마 '철인왕후'(2020)
tvN 드라마 '하백의 신부 2017'(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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