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에 대해서 쓰고 싶다면, 이번 봄에 어떤 생각을 했는지 쓰지 말고, 무엇을 보고 듣고 맛보고 느꼈는지를 쓰세요.”
-김연수, 『소설가의 일』 (문학동네, 2014)
‘스토리(Story)’나 ‘내러티브(Narrative)’는 주로 영화나 소설의 이야기에 대해 말할 때 쓰이는 용어다. 영화 하나를 예로 들면 대략 이런 식으로 설명할 수 있다. ‘우연한 아이디어로 뉴욕 증권가를 호령하던 전설적인 한 인물이 약물 문제 등 여러 이유로 겪는 흥망성쇠를 다룬 이야기’라고 어떤 작품을 소개한다면 그건 스토리의 영역이다. 그러나 그 이야기가 ‘관객으로 하여금 해당 인물에게 이입하도록 하는 게 아니라 그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조소하듯 관찰하게 하다가 결국에는 그에게 현혹당했던 영화 속 수많은 사람들과 스스로를 동일시하게 만들어버리는 서늘한 이야기’라고 말한다면 그건 내러티브의 영역이다. 한편 이 이야기가 사건이 벌어진 시간 순서대로 펼쳐지는지 혹은 몇 년 전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비선형적으로 전개되는지를 논한다면 그건 ‘플롯(Plot)’에 대한 것이다.
위에 적은 예시는 영화 <더 울프 오브 월 스트리트>(2013)에 대해 생각나는 대로 쓴 것인데, 당연히 이 영화에 대해 몰라도 상관없으며 위 내용에는 스포일러가 없다. 요지는 기록한다는 건 자세해질수록, 그 인과 관계나 맥락을 충분히 잘 들여다볼수록, 그리고 축약하지 않을수록 고유해진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나는 <더 울프 오브 월 스트리트>에 대해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연기 개 쩔고 마고 로비 예쁜 영화” 정도로만 기억하고 싶지는 않다. 자신의 취향과 가치관의 영역에 이르는 이런 종류의 기록이라면 그걸 고유한 것으로 만들 수 있는 건 자신뿐이다. 스토리는 아무나 만들 수 있지만 내러티브는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으로서 삶의 주인이 되어 스스로에 대해 충실히 들여다보고 기록할 때 가능해진다.
영화 한 편을 보고 나면 무수히 많은 생각들과 감정들이 내 안에 생겨난다. 굳이 시간과 노력을 들여서 생각해보지 않더라도 그것들은 이미 무의식과 감각의 형태로서 내 경험으로 형성된다. 굳이 말하고 쓰지 않아도 내 안에는 이미 어떤 추상의 형태로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매 순간 한 번에 한 가지의 감각만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을까. 그것들 중 많은 부분은 대체로 ‘재미있었다’라든가 ‘여운이 남는다’ 같은 축약된 느낌으로 남기 쉽다. 영화에 대해 말하고 쓰는 직업을 가진 이가 아닌 이상 이런 일은 자연스럽고 세상에는 즐길 것들이 너무나도 넘쳐난다. 당장 내 이야길 하더라도, 넷플릭스에는 보고 싶다고 ‘찜’ 해둔 영화와 TV 시리즈가 수십 편이 넘고, 온라인 서점 장바구니에도 일종의 즐겨찾기처럼 몇 백 권의 책들이 담겨 있다. 대체 그것들을 언제 다 보고 읽고 생각하고 기록하지? 아무리 노력해도 나는 그것들을 다 소화해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씩 천천히, 내게는 끊임없이 이야기들이 생겨날 것이다. 내 이야기가 끊임없을 수 있는 건 매일 기록하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고 나면 글을 쓴다. 책을 읽는 동안 마음에 드는 문장에 표시를 하고 다 읽고 나면 그것들을 정리한다. 이런 작업들을 규칙적이고 지속적으로 함으로써 일상에서 만나는 수많은 경험과 감각을 좀 더 내 삶에 의미가 있는 쪽으로 만든다.
이 바쁜 일상에서 기록이 왜 필요한지에 대해 말하려면 '스스로의 삶에 서사를 부여하기 위해서'라고 나는 일단 써야만 한다. 좀 더 영화적으로 표현해보자면 누군가 대신, 대충, 혹은 잘못 요약해버릴지도 모르는 '스토리'가 아니라 수많은 일상의 파편과 부분들을 끌어모아서 오직 내 의도에 따라서만 기술될 수 있는 '내러티브'로 만들기 위한 작업의 초석. 그것이 바로 자신에 대해 기록하는 일이다. 돌아보고 생각하고 기록하지 않는 한 그 순간이 지나면 대부분의 것들은 그저 불분명하고 희미한 느낌만 남은 채로 휘발된다. 그걸 글로 쓰려면 생각과 감정을 잘 들여다보아야 한다. 그리고 들여다보기 위해서는 스스로에게 기록할 시간을 허락해야 한다. 그 영화는 왜 내 취향이었지? 나는 왜 이 작가의 소설을 좋아할까? 지금 내게 필요한 건 어떤 장르일까? …
아쉽게도 기록한다는 건 늘 미완의 문장을 겨우 남겨두는 일이다. 내가 본 ‘그 영화’의 바로 그 느낌이라는 건 영화가 끝나는 즉시 휘발될 뿐 아니라 영화의 상영시간이 지나는 동안에도 언제든지 새로운 것들로 대체된다. 보는 동안 무의식 중에 중요하다고 느꼈던 장면이나 대사도 보고 나면 다 기억해내지 못한다. 기억력에는 한계가 있고 이 순간에도 새로운 콘텐츠는 홍수처럼 쏟아져 나온다. 그러니 기록하다 보면 ‘이 느낌이 내가 그때 그 장면에서 본 그게 맞나?’, ‘이렇게 표현하는 게 과연 정확한가?’ 따위의 생각을 품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실상 기록이 가치 있어지는 건 그것이 완전하고 정확해서가 아니라 쌓이고 쌓임으로 인해서 생겨나는 역사성으로 인해서다. 아무도 읽어주지 않는다고 해도 그 기록을 쓴 바로 자신이 어제보다 오늘, 오늘보다 내일 나날이 성숙해가면서 생겨나기도 하는 게 개인의 역사다. 매일 무엇인가를 돌아보며 끼적이다 보면 시간이 지났을 때 그 쓰임의 흔적들이, 행위들이, 그 과정에서 남은 것들이, 고스란히 자신의 지난 하루를 말해주는 증언이 되어 있는 것이다. 당장의 기록이 모두 정확하고 철저해야만 할 필요는 없다. 돌아보면, 그 불완전하고 부정확한 문장들도 단서가 되고 실마리가 되기도 한다.
이것이 영화 감상에만 적용되는 건 아니다. 누군가와 함께 거닐었던 길의 풍경과 한낮의 하늘 색깔과 구름의 모양들, 어제 먹은 점심 메뉴의 종류와 저녁에 마신 위스키의 풍미. 읽고 있는 이 책에서 공감되어 마음에 와닿은 어떤 문장. 친구와 전화하다 수화기 너머로 들었던 다정한 위로의 말들. 다음 주에 예매하기로 한 콘서트 티켓. 앞으로 말해볼 것은 주로 영화를 관람하고 난 뒤의 감상에 대해 빈번하게 예시를 들어 설명하는 이야기들일 것이다. 대한민국 국민 1인당 연평균 영화 관람 횟수가 4회이고 이 수치가 세계 최고 수준(2020년 2월 영화진흥위원회 자료에 따르면 이 수치는 4.37로, 영화산업의 중심지인 미국보다도 높다)이어서가 아니라 이 이야기를 쓰는 본인의 주 관심사가 영화라서 어쩔 수 없이 그렇다. 물론 이건 소설이든 드라마든 어디에 대입해도 괜찮고 대중문화나 예술이 아니라 당신의 사소한 일상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기록하지 않는다면? 그건 ‘그런 게 있었다’ 정도의 감각으로만 막연하게 남는다. 그러나 그것에 대해 들여다보는 순간, 보이지 않는 사이에 알지 못하는 동안에 어떤 일이 일어난다.
그 ‘어떤 일’이라는 건 기록하기를 통해 삶의 진실성을 획득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인데, 기록으로 삶의 진실성을 획득한다는 건 식사를 하고 양치를 하듯 글을 쓰는 게 자연스러워진다는 뜻이다. 이건 유감스럽게도(?) 일정한 시간이 지나야만 일어나는 일이기도 하다. 내 방식대로 말하자면 글을 쓰는 사람에게 진실한 것은 말 그대로 글을 멈추지 않고 쓰는 것이다. 글 한 편만 써서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을지 모른다. 그러나 같은 영화 한 편에 대해서도 재미있었다고 평점 5점을 주고 다음날 잊어버리는 삶과 그 영화에 대해 노트나 블로그에 무엇인가를 기록하는 삶은 다른 삶이 된다. 쓰기를 한 달, 여섯 달, 일 년쯤 계속하다 보면 그 전후에는 분명 어떤 변화가 있게 된다. 문학적으로 표현하자면 개연성을 지나 핍진성으로 향하는 다리. 계속한다는 건 개연하기만 한 게 아니라 핍진(진실에 가까움)해진다는 뜻이다. 처음부터 대단한 걸 쓸 필요는 없다. 시작은 “대박 꿀잼이었다!” 같은 것일 수도 있다. 다음날에는 재미있었던 장면에 대해 쓸 수 있을 것이다. 그다음 날에는 그 장면에서 주인공의 말과 행동이 어땠는지를 떠올려볼 것이고 또 어느 날에는 언젠가 재미있게 봤던 어떤 영화의 패러디가 거기 담겨 있었다고 떠올릴지도 모른다.
영화를 1,000편을 넘게 봤어도 그것들에 대해 돌아보기와 기록하기의 과정이 없었다면 그 각각의 영화들은 대부분 ‘재미있게 보긴 했던 거 같은데 누가 나왔더라?’, ‘무슨 내용이었더라?’, ‘주인공이 결말에서 죽었나?’ 같은 해소되지 않는 의문만을 남긴 채 ‘평점 몇 점짜리’로만 기억될 뿐이다. 그러나 영화를 100편밖에 보지 않았더라도 하나하나에 관해 기록하거나 최소한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눠보았다면, 그 세부는 더 자세해지고 그 내용은 삶에 더 긴밀한 의미가 있는 쪽으로 향한다. 어떤 영화를 볼 때 더 흥미롭다고 느끼는지. 어떤 성격을 가진 주인공에게 더 감정적으로 이입하게 되는지. 실화 소재 영화를 좋아하는지 SF와 판타지를 좋아하는지. 같은 시간만큼의 삶을 살아도 특별할 것 없는 ‘남들만큼’의 순간으로 채워질 수도 있고 영화 한 편을 보더라도 순간의 경험을 최선을 다해 만끽하고 그 여운을 즐기는 동안 더 긴 시간을 살아가는 것이나 다름없게 될 수 있는데, 이는 매 순간의 경험을 소중하게 여기고 평범해 보이는 나날에서 사소하지만 특별한 의미를 발견하고자 하는 태도에서 비롯한다. 그리고 그 태도를 태도에 그치지 않고 삶의 방식으로 만드는 가장 구체적이고 확실한 방법은 일상을 기록하는 것이다.
그러니 하루 종일 영화 이야기를 하는 것도 김동진이라는 사람이 지닌 핍진성에 따른 자연스러운 행위라고 포장해두겠다. 기록하기를 시작한 뒤 멈추지 않다 보니 벌써 8년이 넘게 지났고, 그러다 보니 나는 쓰는 사람이 되었다. 어느 날 갑자기가 아니라 하루가 쌓여 이틀이 되고 일주일이 되는 일들이 반복된 결과 그렇게 됐다. 그래서, 내 취미는 ‘천천히’이며 특기는 ‘꾸준하게’다. 오늘 그렇다는 건 내일도 그러하겠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