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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진 Apr 26. 2022

모두가 나쁜 사람이 아니게 되는 곳

<디어 마이 뮤직> 시즌 5


 “여기서는 네가 나쁜 사람이라고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이 없어.”



<비포 선라이즈>(1995)에서 '셀린'(줄리 델피)이 '제시'(에단 호크)에게 하는 말 중에는 위와 같은 내용이 있다. 아직 서로의 하루가 무르익기 전이다. 물론 이건 당신이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 몰라 믿음이 안 간다는 투의 부정적인 말이 아니라, 둘 사이가 미국도 프랑스도 아닌 이곳, 오스트리아 빈이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것을 상기하는 말이다. 서로에 대해 아는 사람이 서로 말고는 없는 곳. 둘 다 각자의 일상에서 벗어난 장소이기 때문에 오히려 서로의 대화와 순간의 분위기에 집중할 수 있는 곳. 그러니까 셀린은 제시한테, 지금 둘 다 자신의 집을 떠나온 여행자라는 신분에 있기 때문에, 원래 여정을 벗어나 빈에서 무작정 내렸기 때문에 두 사람 사이의 대화가 이렇게 진전될 수 있었다고 말하는 중이다. (저 말의 원문은 “I love this because no one knows I'm here and I don't know anyone that knows you that would tell me all the bad things you've done.”이다.)


영화 '비포 선라이즈' 스틸컷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 본인이 겪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쓰인 <비포 선라이즈>의 이야기에는 인상적으로 담아두고 싶은 대목이 많다. 서두에 인용한 이야기는 우리가 낯선 사람, 즉 이미 알고 있는 가족이나 친구, 동료 등이 아닌 사람과 영화나 책, 음악 등을 주제로 하여 왜 서로 밀접한 대화를 오래 나눌 수 있는지에 대한 것과 닮아 있다는 생각을 한다. 어떤 모임이나 사교적인 자리에 참석하는 우리는 모두 짧은 시간이나마 일상을 벗어나는 여행자나 마찬가지인 것이겠고, 그 여행지에서 우리는 특정한 종류의 선입견이나 상대에 대한 판단 없이 오직 대화의 내용 자체와 그 말들이 오가는 '사이'들에 집중하게 된다.


취향을 주제로 대화하는 일은 자기 생각이나 해석 따위를 다른 사람에게 설득시키는 게 아니라 서로가 다르게 생각할 수 있는 주제에 대해 그 다름을 확인하는 것 자체에 목적이 있다. 가령 어떤 영화의 결말에 대해 서로 생각하는 바가 다르다면 각자 근거 혹은 그렇게 느낀 계기가 있다. 특정 장면 안에서 자신이 그리 생각한 배경을 찾을 수도 있고, 또 이를테면 영화 주인공과 비슷한 종류의 경험을 한 적 있는 어떤 사람은 자신이 겪은 것을 바탕으로 영화가 보여주지 않은 결말 이후를 추론해볼 수도 있다.


영화 모임을 진행할 때, 기본적으로 감독이나 배우의 인터뷰라든가 원작 소설에 대한 정보 등은 물론이고 그 영화를 주제로 함께 나눠볼 만한 화두를 여러 가지로 준비한다. 그래도 현장에서는 언제나 생각지 못했던 포인트, 사소하게 넘어갔던 장면에 대한 의견들이 나온다. 오랜 시간을 공들이고 생각한다 한들, 기껏해야 삶의 영역 안에 있는 1인분의 영화에 대해서만 준비할 수 있을 따름이다. 그럴 때는 ‘아, 왜 그걸 생각하지 못했을까’가 아니라 ‘그렇게 생각해볼 수도 있겠구나’ 하고 깨달음을 얻거나 공감 혹은 감탄을 하게 된다. '나'가 아닌 다른 사람이어서, 그 다른 사람과 대화하는 과정을 통해서만 알아질 수 있는 것이 거기 있다.


<비포 선라이즈>에는 좋아하는 말이 하나 더 있다. 만약 신이 있다면 너와 내 안에 있는 게 아니라, 바로 우리 사이에 있을 거야. 원문은 이렇다. “I believe if there's any kind of God it wouldn't be in any of us, not you or me but just this little space in between.” 필연적으로 시간에 관해 말할 수밖에 없게 된다. 영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보고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다는 건 시작하고 나서 되돌릴 수 없고 거스를 수도 없는 일정한 시간 동안 그 세계 안에 있다 나오는 것이니까. (<비포 선라이즈> 이후 만들어진 <비포 선셋>(2004)과 <비포 미드나잇>(2013), 그리고 링클레이터 감독의 또 다른 역작인 <보이후드>(2013)를 생각하면 리처드 링클레이터만큼 시간에 대해 직접적으로 생각해보게 하는 감독도 드물겠다.)


다시, “신이 있다면 각자의 안에 있는 게 아니라 서로의 사이에 있다”는 말. 이 대사량 많은 영화의 시간이 선사하는 마법은 '셀린'도 ‘제시’도 둘 다 말하고 있지 않은 그 짧은 휴지, 여백, 그런 순간들에 있을 테다. 이 말 역시 '셀린'이 하는 말인데, 그 말을 들은 '제시'는 한동안 말을 잇지 않고 '셀린'을 미소와 함께 가만히 바라본다. 어느 골목길에서. 아침 기차를 타야 한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정해져 있지 않고 알지도 못하는 그 순간. 아마 '제시'는 지나온 그 하루의 순간들을 다시 떠올리며, 눈앞에 있는 '셀린'이 참 사랑스럽다고 생각하며, 그리고 이 하루가 최대한 느리게 흐르길 바랐을 것이다. 몇 번이고 영화의 같은 장면을 복기하고 돌려보는 관객 역시 마찬가지의 심정이 된다.


살다 보면 수많은 생각이나 자극들이 크고 작게, 짧고 길게 스친다. 그중 다수는 얼마 지나지 않아 희미해지고 흐릿해지지만 그중에서 어떤 것은 특히 인상적으로 각인되고 오랜 기억으로 형성된다. 시간이 멈춘 기분이라든지 믿을 수 없어 비현실적이라든지 아니면 영화 같다든지 하는 표현을 떠올린다. 무엇이라 하든 간에, 어떤 <순간>은 '셀린'의 저 말을 들었을 때의 '제시'의 마음처럼, 지금 이 순간이 삶에서 특정한 기억으로 자리 잡을지도 모르겠구나 하는 감각을 갖게 되는 순간이다. 시간의 신이 있다면 그때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망원동 '가가77페이지'에서

최근에 참여한 한 모임의 이야기 덕분에 <비포 선라이즈>의 잔영을 다시 생각했다. 누구도 나쁜 사람이 아니게 되는 곳. 망원동 ‘가가77페이지’에서 격주로 세 번 열린 <디어 마이 뮤직> 모임은 몇 편의 책과 영화들을 주제로 둘러앉아 각자의 감상을 꺼내고 거기 어울리는 음악들을 나누는 취향의 시간들이었다. 사적으로 말하면 근 몇 년 간 주를 이룬 것은 직접 진행하는 강의나 모임들이었고, 진행자 스스로에게도 채워지고 감각되는 소중한 경험들이 분명 있지만 ‘잘 준비해야 한다는 의무감’보다 ‘잘 즐기면 된다는 행복감’이 우선하는 자리에 앉은 일은 많지 않았다.


각자의 ‘올해 가장 재미있게 본 영화’, ‘좋아하는 음악 장르’ 등과 같은 약간의 소개 있고 나면 몇 꺼풀의 얇은 장벽을 지나 진짜 이야기가 시작된다. 좋아하는 세계의 영토를 넓히는 일에는 새로운 자극을 받아들이는 마음과 그 감각을 소중하다고 여길 수 있는 태도가 동반한다. 미지의 사운드가 익숙하게 알고 있던 것들과 연결되는 과정에 호스트와 함께 모임에 참여한 이들의 살아온 경험들이 섞이니 이제껏 거기 있다고 생각하지 못했던 <나를 뺀 세상의 전부>가 밀려온다.


망원동 '가가77페이지'에서
망원동 '가가77페이지'에서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과 유아사 마사아키의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2017)에 곁들여 검정치마의 ‘Everything’, Papooz의 ‘Hell of a Woman’ 같은 음악들이 재생목록에 올라온다. 존 윌리엄스의 『스토너』와 하마구치 류스케의 <드라이브 마이 카>(2021)에 곁들여 언니네 이발관의 ‘가장 보통의 존재’ 같은 음악이 추가된다. 모임이 끝난 뒤에도 그룹 채팅방에는 각자 좋아하는 곡, 모임 때 말하려고 했으나 미처 꺼내지 못한 취향들, 책 속의 공감했던 문장, ‘그 가수’의 공연 실황 같은 것들이 줄을 이어 공유된다.


https://brunch.co.kr/@cosmos-j/1395


친애하는 낯선 음악들에게. 첫 모임을 마친 뒤 이렇게 썼다. 첫 모임을 시작하고부터 마지막 3회차 모임을 마치기까지 그리 오랜 기간이 아니었다. <디어 마이 뮤직>의 한 달 남짓의 시간은 적지 않은 즐거움이자 새로움이었다. 모임에서 언급되는 곡들을 한데 모으기 위해 직접 만든 유튜브 재생목록에는 195곡의 트랙이 쌓였다. 리스트를 만들었지만 절반 이상은 아직도 듣지 못했다. 좋아하는 것들이 나날이 쌓여가는 동안 “세상에 이런 음악도 있었어” 하는 작은 탄성을 짓게 하는 자극은 그보다 더 많이 축적된다. 아마도 그것들 중 상당수는 또 잊히기도 하겠다.


https://youtube.com/playlist?list=PLVCvEYPBQ-nSOoHRVw9k89ecav--bkXCX



망원동 '가가77페이지'에서

이번으로 다섯 번째 시즌을 맞이했던 <디어 마이 뮤직>의 마지막 시간에는 ‘나를 표현하는 음악’을 꺼냈다. 그건 가장 좋아하는 것일 수도 있고 자신의 가치관과 세계관에 사운드트랙으로 가장 어울리는 테마곡일 수도 있겠다. 몇 개의 후보를 떠올리며 발화한 것은 영화 <스타 이즈 본>(2018)에서 '잭슨'(브래들리 쿠퍼)이 부른 곡 ‘Maybe It’s Time’이었다. 여러 번 이야기 한 적 있는 “왔던 곳으로 돌아갈 수 없어 다행이야”라는 가사. 좋은 소설이나 좋은 영화가 그렇듯, 소중하고 각별하다고 느껴지는 어떤 순간을 경험하고 나면 그의 삶은 그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분기점을 지나고 있게 된다. 가령, 소설 『스토너』와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는 진작부터 ‘봐야 할/보고 싶은’ 작품의 목록에 있었지만 <디어 마이 뮤직>의 시간들이 아니었다면 그 경험은 얼마간 더 유예되었을 것이다. 게다가 두 작품 사이를 관통하는 듯한 안톤 체호프의 『바냐 아저씨』 속 (영화상 수어로 이야기되는) 인용도 기억해두지 못했겠지. 영화 <클로저>와 영화 <라빠르망>을 함께 보지 못했다면 두 영화 사이의 유사성을 발견하지 못했을지 모르고 십수 명의 새로운 아티스트를 접하는 일 또한 나중의 일이 되거나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겠다.


우리가 살아 있는 세계는
우리가 살아가야 할 세계와 다를 테니
그때는 사랑이 많은 사람이 되어 만나자

-이병률, ‘이 넉넉한 쓸쓸함’에서,  『바다는 잘 있습니다』(문학과지성사, 2017)


불완전한 두뇌와 마음은 오늘을 맞이하는 모든 경험 중 상당수를 기어이 휘발해버린다. 그러고 싶지 않아 사진이나 일기와 같은 갖가지 기록을 동원하고 그것의 오감과 세부를 풍성하게 해주는 음악 등을 더 동원하지만 그것마저도 쌓이고 쌓여 그 경험에 속한 감각의 일부는 다시 흐릿해진다. 그렇지만 어떤 순간은 선연하다. 거의 밤 열한 시가 넘었을 무렵, 마지막 모임을 마치고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아쉬운 듯 간신히 떼어 서점의 밖으로 나오고 난 뒤에도 한동안 둘러서서 최선을 다해 마지막을 유예하는 사람들. 동그랗게 선 채 막차 시간이나 가야 할 방향과 같은 말들로 마스크 뒤의 표정들을 미처 숨길 겨를도 없이 변죽을 울리는 일을 나는 꽤 여러 번 경험해왔다.


예술이나 철학이나 종교가 “인간이 세계를 개선하려는 태도를 유지하도록 지지”해주듯이(김혜리 기자, 『씨네 21』에서) 삶의 현재를 지탱해주는 것은 과거의 어떤 순간이기도 하다. 살면서 특정한 소설이나 영화, 음악을 처음 만났을 때의 기억이 스치는 순간이 있다면 거기 일정한 지분은 <디어 마이 뮤직>에 할애하고 있을 것이다. 어떤 작품을 처음 만났을 때의 경이로움과 경외감을, 처음이 지나고 나면 영영 되돌릴 수 없는 그 떨림을 기억하는 것으로 앞으로의 삶이 살아지듯이, 살아갈 ‘나’를 능히 지탱해주는 하나의 계절이 여기 있었다고 생각한다. 낯설었던 음악들은 이제 곁에,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꺼낼 수 있는 재생목록 안에 있다. 스크린에 띄워져 있던 문장을 한 번 더 중얼거린다. “우리, 영원히 취향과 낭만을 가진 어른이 돼요.”


'디어 마이 뮤직'의 아직 시작되지 않은 다음 시즌을 기다리며

"바냐 아저씨, 우리 살아가도록 해요. 길고 긴 낮과 긴긴밤의 연속을 살아가는 거예요. 운명이 가져다주는 시련을 참고 견디며 마음의 평화가 없더라도 지금 이 순간에도 나이 든 후에도 다른 사람을 위해서 일하도록 해요. 그리고 언젠가 마지막이 오면 얌전히 죽는 거예요. 그리고 저세상에 가서 얘기해요, 우린 고통받았다고. 울었다고, 괴로웠다고요. 그러면 하느님께서도 우리를 어여삐 여기시겠지요. 그리고 아저씨와 나는 밝고 훌륭하고 꿈과 같은 삶을 보게 되겠지요. 그러면 우린 기쁨에 넘쳐서 미소를 지으며 지금 우리의 불행을 돌아볼 수 있을 거예요. 그렇게 드디어 우린 평온을 얻게 되겠지요. 저는 그렇게 믿어요. 열렬히 가슴 뜨겁게 믿어요. 그때가 오면 우린 편히 쉴 수 있을 거예요. 편히 쉴 수 있을 거예요."

-안톤 체호프, 『바냐 아저씨』에서,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로부터 재인용


@siziz.pic


<디어 마이 뮤직>에서 다룬 작품들


책 『노르웨이의 숲』(민음사, 2017)

영화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2017)

책 『아무튼, 술』(제철소, 2019)

영화 <클로저>(2004)

영화 <라빠르망>(1996)

영화 <드라이브 마이카>(2021)

책 『스토너』(알에이치코리아, 2015)



*인스타그램: @cosmos__j

*모임/강의 등 공지사항: bit.ly/cosmos__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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