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지금 만나러 갑니다’(2018) 리뷰
TV 속 경쾌한 음악과 기상캐스터의 친근한 목소리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 이번 주말에는 장마 소식이 있겠는데요. 토요일에 제주도를 시작으로 일요일에는 충청 이남 지역까지 장맛비가 내리겠습니다. (...)” 아침 식사 중인 ‘우진’과 ‘지호’ 부자는 지금 곁에 없는 누군가를 생각한다. ‘수아’는 비의 계절에 돌아오겠다는 말을 남긴 채 1년 전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예보를 보면서 두 사람의 마음은 동요한다.
동명의 일본 영화를 리메이크한 손예진, 소지섭 주연의 <지금 만나러 갑니다>(2018)는 원작이 그렇듯 멜로 이전에 판타지라는 우산을 쓰고 있다. 1년 전 세상을 떠난 가족이 거짓말처럼 장마의 시작과 함께 돌아왔다가 장마의 끝과 함께 떠나는 이야기. 팍팍해진 세상사를 반영하듯 로맨스 영화를 만나기 어렵게 된 오늘날에도, <지금 만나러 갑니다>는 <접속>(1997)과 <너는 내 운명>(2005) 같은 영화를 이스터에그처럼 등장시키며 어쩌면 다시는 없을 사랑의 가치를 전하려 하는 듯 보인다. 비에 대해서라면 3월호에서 <비와 당신의 이야기>를 통해서 다룬 적 있지만, 여기서는 그보다 좀 더 마법 같은 일에 기대어보려고 한다.
우진과 지호 시점뿐 아니라, 영화는 당연하게도 ‘돌아온’ 수아 시점도 중요하게 다룬다. 아니, 후자가 더 중요하다. 얼핏 전자의 시점처럼 보이던 이야기는 대학생이던 수아가 어느 날 교통사고를 당해 의식을 잃은 채 꿈처럼 8년 뒤 자신의 미래를 만나게 된다는 정보가 개입되는 순간 의미가 확장된다. 그러니까 ‘1년 전 죽은 수아가 장마와 함께 돌아왔다’고 하면 판타지가 되지만 사고로 잠시 미래를 체험하는 듯한 꿈을 꾼 수아의 이야기라고 하면 좀 더 설득력이 있을는지. 극 초중반 수아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상태로 집안 곳곳의 사진첩과 일기장, 그리고 우진과 지호의 말들을 통해 과거를 듣는다. 플래시백처럼 펼쳐지는 지난 이야기는 귀엽고 풋풋하다. 고등학교 3년 내내 같은 반이면서도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지 못하는 에피소드라든지 말 못 할 사정으로 엇갈리기도 하는 이야기들은 청춘 남녀의 흔한 사랑담 같다. 게다가 두 사람이 각자 우산을 쓴 채로 서 있는 버스 정류장의 장면이나 비가 올까 우비를 챙겨 입고 등교하는 아이의 모습, 혹은 석양을 등지고 강변 다리 위를 자전거 타고 달리는 장면 등을 통해 영화는 여름이라는 계절감을 획득한다. 마치 모든 사랑은 여름에 시작되었다고 역설하기라도 하듯이 말이다.
고온에 쉽게 지치고 쏟아지는 비에 마음까지 축축해지고 눅눅해진다. 내게 여름은 언제나 덥고 습한 날씨 덕에 무기력해지고 야외 활동을 최대한 피하게 되는 계절이었다. 그렇지만 여름은 어디서든 살아있는 것들이 뿜어내는 생명력이 절정에 이르고 초록이 가장 선명한 계절이기도 하다. 달리 보면 태양은 뜨겁기만 한 게 아니라 밝기도 하고 이따금 시원한 바람이 다가와 땀을 말려주기도 한다. 수아는 왜 비의 계절에 돌아오겠다고 했을까. 미래 시점에서 말하자면 자신의 부재가 남겨질 두 사람의 삶을 너무 무기력하게 만들진 않기를 바라는 뜻일 테다. 어쩌면 수아는 여름을, 장마를 선택한 것인지도 모른다. 두 사람이 기다릴 수 있게.
사고 이후 의식을 회복한 뒤, 아직 일어나지 않은 모든 일들을 미리 겪고 난 수아는 이렇게 생각한다. “만약 이대로 당신과 헤어진 채 살아간다면 다른 사람과 결혼해 다른 삶을 살게 되겠지. 그러면 서른두 살에 죽지 않는 다른 미래가 올까? 그러면 더 행복할까?” 자신이 사고로 죽지 않은 것이 미래에서 두 사람이 간절히 기다리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고 여기는 마음이다. 꿈처럼 한철 장마를 겪은 뒤의 수아는, 그것이 너무도 생생하고도 소중해서 다른 미래를 택하고 싶지 않다고 믿는다.
“아무 걱정 하지 마. 우린 잘할 거야, 그렇게 정해져 있어.”
내게 여름은 누군가 이렇게 말해주는 순간이 절실한 계절이다. 수아는 자신이 꿈처럼 미리 겪은 미래를 정말로 살고 싶다고 생각하며, 어리둥절한 채 기차역에 선 우진에게 다가가 위와 같이 말한다. 장마가 분명히 오고 분명히 지나가는 것처럼, 불확실한 삶 속에서도 정확한 일들이 분명 있다. 작년 여름에도 “이 여름도, 잘못될 리가 없어”라고 썼다. 올해에도 똑같이 말해주고 싶다. 지금의 더 확실한 것들에 충실할수록 바라던 앞날에 조금 더 가까워질 수 있다고. 그러니 이번 계절도 잘 견뎌보자고. 이렇게 쓰며 다가온 여름을 만나러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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