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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진 Aug 01. 2016

현실의 시간에도 낭만은 존재한다는 성숙한 시선

<비포 미드나잇>(2013), 리처드 링클레이터

국내 개봉용 전단의 문구처럼 '아직 끝나지 않은 사랑'을 기대하며 에단 호크에게 반할 준비를 한 관객이라면 <비포 미드나잇>의 첫 장면은 그 기대를 아낌 없이 무너뜨린다. 20대 초반의 풋풋하고 활기 넘치는 모습은 어디로 사라지고, 나오기 시작한 배, 분명 감지 않았을 것 같은 머리, 정돈되지 않은 수염에 그제서야 사람은 누구나 나이를 먹는다는 거스를 수 없는 명제를 상기한다. 공항에서 '아들'을 배웅하고 공항을 나서는 '제시'(에단 호크)의 시선에 어느새 '아줌마'가 된 '셀린'(줄리 델피)의 모습이 들어온다. (이 일련의 시퀀스의 마지막 컷은 '제시'도 '셀린'도 아닌, 사랑스런 쌍둥이 '엘라'와 '니나'다.)



이제 15분 남짓한 영화의 상영 시간 동안 '제시'가 운전하고 '셀린'이 조수석에 탄 채 뒷좌석에 쌍둥이가 잠든 차 안을 일관되게 비추는 테이크를 만날 차례다. 사랑과 철학에 대해 이야기하던 20대의 두 사람은 30대에 접어들어 사회 문제와 국제 정세에 대해 논하기 시작했고, 40대의 둘은 생계를 이야기하고 자녀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러다가 조금씩 주거의 문제로 불똥이 튀고 언쟁이 시작되는 듯 싶더니 먹던 사과가 어디로 갔냐는 딸의 물음에 소강상태를 맞는다. 여기서 딸아이가 찾는 사과는 갈색으로 겉이 변색돼 있다. (대조적으로 게스트하우스에 함께 머무르는 '안나'(아리안 라베드)가 꺼내드는 사과는 냉장고에서 갓 꺼낸 아삭한 사과다.)


이 정도 이야기하면 <비포 미드나잇>은 삶에 찌들어 낭만 따위 누릴 겨를 없는 중년 부부의 흔한 단면을 내보이는 현실밀착 드라마다. 사실이다. 모처럼 사랑을 나누려다가도 아들의 전화를 받아야 하고 싸우는 것은 일상이며 꿈 대신 먹고 사는 숙제만 남았다. 심지어 '셀린'은 "쌍둥이 아니었으면 우리가 지금까지 같이 살 수 있었겠냐"고 묻는다. 중반부 사람들이 한데 모여 식사를 하는 장면에서는 흘러가는 것들과 덧없이 사라져간 것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 영화가 청소년 관람불가이기를 택한 것은, 분명히 '제시'와 '셀린'이 40대이기 때문이라 여긴다. 나이를 먹었고 삶의 현실적 무게에 일정 부분 눌려 있다는 것을 더 확실하게 각인시키기 위함이다. 과거를 부정하지 않는 사고와 미래를 낙관하지는 않되 받아들일 줄 아는 마음가짐은 연출자와 배우의 태도로서 고스란히 영화의 여정에 녹아든다. '그때'로 다시 돌아가도 자신에게 말을 걸고 기차에서 함께 내릴 수 있겠느냐는 영화 전체의 질문에 대해 결과적으로 영화 전체가 스스로 답을 내린다.


그래서 해가 뜨거나 지는 시간이 아니라 다음날, 즉 내일과 맞닿아 있는 '미드나잇'이 영화의 제목이자 '제시'와 '셀린'의 현재의 관계를 투영하는 역할을 한다. 하루의 끝이지만 동시에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는 순간인 것이다. 해질 무렵의 노천 카페에서 해를 바라보며 "아직 있다"고 세 번 말하는 '셀린'의 대사는 그래서 <비포 미드나잇>에서 꽤 의미심장한 몇 개의 순간들 중 하나다. 물이 반이나 남았느냐, 반밖에 남지 않았느냐 하는 차이다. 둘은 여전히 사랑한다. 그리고 또 싸울 것이다. "더 이상 못해먹곘는" 힘든 순간도 찾아올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건 둘은 그래도 견디고 있으며, 날카롭게 날을 세우고 있으면서도 서로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데에 있다. 20대에는 생각하지 못했고 30대에는 느끼지 못했던 것들을 '제시'와 '셀린'은 지금이기에 공유해낸다. 시간이 흐른다는 것 역시 인식의 문제인 것이다.


'이만큼이나 흘러왔지만 그래서 지금의 우리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상기하며, '제시'와 '셀린'은 다시 1편 <비포 선라이즈>의 기차 안 어느 중년 부부의 모습과 겹쳐진다. 부부이기 때문에 싸운다. <비포 선라이즈>가 <비포 선셋>을 거쳐 <비포 미드나잇>에 도달한 후, 다시 '<비포 선라이즈>'로 닿는 과정은 그렇게 완성된다. <비포 선라이즈>에서 "머리를 어떻게 빗는지, 옷은 어떻게 입는지,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말하는지" 아는 게 진정한 사랑이라 호기롭게 말하던 '제시'는 <비포 미드나잇>의 '제시'와 같은 사람이다. '셀린'도 그걸 알고 있다.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과 에단 호크, 줄리 델피는 1편을 촬영할 때만 해도 2편과 3편에 대한 계획이 없었다. 다만 예상하지 못했고 계획하지 않았던 대로 둘의 삶과, 둘을 연기한 배우의 모습은 오늘에 도달했다. 2022년 혹은 그 무렵, <비포 트와일라잇> 같은 영화가 극장에 걸려 있는 모습을 떠올려본다. (★ 9/10점.)




<비포 미드나잇(Before Midnight, 2013), 리처드 링클레이터

2013년 5월 22일 (국내) 개봉, 108분, 청소년 관람불가.


출연: 에단 호크, 줄리 델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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