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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진 Jul 20. 2022

되돌릴 수 있는 시간은 없으니 우리는 선택해야만 하고

구병모 소설 '위저드 베이커리'(2009) 개정판 리뷰

이제는 '영어덜트'로 불리는 소설들을 국내에서도 쉽게 접할 수 있지만 소설가 구병모의 첫 장편인 『위저드 베이커리』(창비, 2009)가 나올 무렵에는 그렇지 않았던 것 같다. '동화'나 '판타지' 같은 키워드는 성인 독자와 가깝지 않다고 여기던 때도 있었는데, "청소년문학이라고 하면 좋은 것이나 결 고운 것을 엄선하여 보여 줌으로써 청소년을 올바른 길로 계도하는 거라는 인식이 있던 시절"(253쪽, '개정판 작가의 말'에서)을 지나 영상매체의 시대에 소설을 통해서만 경험될 수 있는 세계를 『위저드 베이커리』는 보여주려 한다.


연남동 '서점 리스본&포르투'에서

어쩌면 개정판이 나왔어야만 하는 것인지도


공교롭게도 소설이 처음 쓰인 2009년의 독자와 개정판이 나온 2022년의 독자가 느끼는 바는 같지 않겠다. 그저 달콤하고 안온한 것들과 극강의 '매운맛'인 것들이 넘쳐나는 세계의 '위저드 베이커리'에서는 마인드 컨트롤이나 화해를 돕고 사업을 꾸준히 지속하게 해주는 쿠키보다는 등교나 출근을 대신해주는 도플갱어를 만들거나 싫어하는 사람이 일을 망치게 해주는 쿠키가 더 잘 팔릴 것만 같다. 작중 '나'가 겪는 가족 내의 불화나 폭력은 십수 년 전에도 물론 있었겠지만 월급 빼고 다 오르는 것만 같은 시대에, 먹고사는 것이나 타인에게 무시당하지 않는 것이 더욱 중요해진 시기에 이 베이커리의 인기 메뉴는 달라져 있을 것이다. 더욱이 '로켓 배송'의 시대라면 각종 마법의 힘이나 저주가 깃든 빵과 과자가 더 쉽게 만날 수 있는 '핫한' 물건이 되어 있을지 모르겠다.


"틀린 선택을 했다는 것 자체가 잘못이라는 게 아니야. 선택의 결과는 스스로 책임지라는 뜻이지. 그 선택의 결과까지 눈에 보이지 않는 힘에 의존하기 시작하면, 너의 선택은 더욱 돌이킬 수 없는 방향으로 나아갈 거란 말을 하는 거야."

-134쪽, '점장'과 '나'의 대화 중에서


그럴수록 선택의 결과에 스스로 책임지는 것에 대해 점장이 '나'에게 해주는 말은 중요하고 유효하다. "보통 사람이 들으면 섬뜩할 얘기를 오늘의 메뉴 설명하듯이"(135쪽) 해주는 말이라면 더욱 뇌리에 다가온다. 작가가 말한 좋은 것이나 결 고운 것 대신 어쩌면 불편하거나 잔혹한 방식으로, 판타지와 미스터리의 외피를 지나서 만날 수 있는 오븐 너머의 화술은 그만큼 장르와 시공간을 넘는 가치를 독자에게 전한다.


글이 있어야 말할 수 있는, 그러나 글을 쓸 겨를이 없는


생각지 못하게 주목했던 설정 중 하나는 주인공 '나'가 그냥 말을 더듬는 것이 아니라 눈앞에 글이 없을 때 그러하다는 점이다. 쓰인 글이 있다면 무슨 말을 할지 알거나 염두한 채로 발화할 수 있다. 그러나 선언과 폭력과 모멸과 냉대 속에서 동화와 현실을 너무 일찍 구분하게 된 아이에게는 어떤 경우 글을 쓸 기회나 여유도 주어지지 않는다. 휴대전화는커녕 100원짜리 동전 하나도 챙기지 못한 채 집을 뛰쳐나와야 했던 그에게는 지금 무슨 말을 해야 할지조차 입에서 나오기 어렵고 다음 말을 고를 겨를은 더더욱 없겠다. 선택에 따르는 책임을 배우기에는 할 수 있는 선택조차 없었을 이가 24시간 베이커리의 오븐 너머 공간을 통해 겪는 몽마의 습격과 말 없는 위로를 지나 『위저드 베이커리』는 '나'가 가장 극적인 상황에서 마주하게 되는 선택을 독자의 것으로 남긴 채 맺는다.


이 소설의 결말은 'Y의 경우'와 'N의 경우'로 나뉘어 열려 있다. 어느 쪽이든 '나'는 결국 "끝나지 않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던 긴 밤의 시련"(165쪽)을 지나온 자신을 인정하거나 혹은 최소한 오해하지 않으려 하는 이들을 떠올리거나 그들을 향해 달린다. 과연 그는 타임 리와인더를 입에 넣었을까. 『위저드 베이커리』는 성장 서사라기보다 지금을 가까스로 견딜 수 있게 된 이에게 어떻게 하면 내일이 있을 수 있는지에 관한 논픽션처럼 읽힌다. 시간을 되감든 빨리 감든 정말로 되돌릴 수 있는 시간이란 건 없으니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만 하고 그에 대한 책임은 소설만의 일이 아닐 것이다.


구병모 소설 '위저드 베이커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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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담: 이렇게 글을 쓸 수 있는 나 같은 독자를 여러 상황에서 의사 표현 자체에 어려움을 겪기도 하는 작중 '나'와 비교하게 되는 경험도 했는데, 그럴수록 이 소설이 '청소년문학상' 같은 키워드로 국한되지 않는 소설일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다. 청소년문학과 청소년문학이 아닌 문학을 의식적으로 구분하는 것의 필요 여부를 생각하는 것이다.



*인스타그램: @cosmos__j

*모임/강의 등 공지사항: bit.ly/cosmos__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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