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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진 Sep 09. 2022

여름의 당신은

능소화, 심규선

1년 전 능소화를 본 날의 '나'와 그로부터 1년 뒤 다시 능소화를 본 '나'는 다를까? 어제는 눅눅해진 날씨 속 작년 사진첩을 보다 꼭 지금 같은 풍경을 보고는 이때도 비 온 뒤 꽃 지던 무렵이었구나 하고 생각했다. 오늘은 무심코 출근 동선을 바꿨는데 꼭 작년에 본 그 꽃들이 눈에 띄었다. 딱히 꽃을 잘 알지도 않고 자연과 식물에 친한 편이 아니지만 오직 계절의 감각, 유월의 냄새. 그런 것들이 시선을 거기 두게 한 모양이다. 사진을 안 찍었구나 깨닫고는 퇴근길에 그곳을 다시 지났다.


똑같은 계절에 흡사한 날씨에 피더라도 전년의 꽃과 금년의 꽃은 같은 꽃이 아니라는, 어쩌면 당연한 이야기를 어디서 읽은 적 있다. 그런 데도 '같은 계절'이라는 사실을 상기한다. 2021년 6월 27일과 2022년 6월 27일 사이에는 365일 만으로는 나타낼 수 없을 천변만화가 있었고, 있는 중이겠지. 돌이켜보면 작년 여름 이 무렵에도, 마치 무슨 일이 내게 새롭게 일어나고 있거나 일어날 것만 같은 예감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 같다. 그때는 '여름이 지내기 힘들다고만 생각했는데 꼭 그렇지만은 않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올해의 내게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 아니 이미 무엇인가 알 수 없는 사이에도 시시각각 일어나는 중인 것일까.


계절과 날씨에 의미를 부여하는 일은 나만의 것도 아닐 것이며 인간의 한두 세기의 일도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특정한 시기를 감각하고 있음을 상기하는 일은 항상 가능한 것이 아니라고 느끼게 된다. 내년 이 무렵에는 지금을 어떻게 생각하게 될까. 지나고 보면 아무런 일도 아닐 사소한 관찰에 불과할지라도.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기로 하며 오늘은 단지 "출근길에 1년 전 오늘 봤던 꽃을 다시 봤다"라고 적어둔다. 꽃이 피고 지는 일을 생각하다 보니 비교적 최근에 본,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공기인형>(2009) 속 내레이션 한 대목이 떠올라 그것을 옮겨 적어둔다. (2022.06.27.)



"생명이란, 혼자서는 완벽해질 수 없도록 만들어졌나 보다. 꽃도 암술과 수술이 있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아서 벌레와 바람이 찾아와 암술과 수술을 만나게 해 준다. 생명은 자기 안에 결여를 품고 있어서 누군가 그 결여를 채워줘야 한다. 사실 세상이란 타인들의 집합소다. 그런데도 서로가 서로의 결여를 채워준다는 건 알지도 못하고 누군가 가르쳐주지도 않는다. 그저 뿔뿔이 흩어져 서로에게 무관심한 채 살아가며 때로는 서로를 혐오하는 것마저 허용되는 관계다. 이렇게까지 세상이라는 곳의 짜임이 허술한 것은 왜일까? 꽃이 피어 있는 곳 바로 근처까지 등에의 모습을 한 타인이 빛을 가득 몰고 날아오고 있다. 나도 한때는 누군가를 돕는 등에였을지 모른다. 당신도 한때는 나를 돕는 바람이었을지 모른다."


어느날 거리의 능소화

"저 혹시...?"

며칠 전에는 집 근처 스타벅스(A)에서 주문을 받는 파트너 분과 서로 알아보았다. 그는 700여 미터 정도 떨어진 다른 스타벅스(B)에서 근무했던 분인데 한동안 다른 구에 있는 지점에서 일하다 얼마 전부터 이 지점에서 근무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 '얼마 전'이 거의 1년 전인데, 아주 규칙적으로 가는 곳은 아니지만 스케줄 근무를 하는 파트너 특성상 그간 한번도 요일과 시간이 맞지 않았을 수 있겠는 것.  마스크를 쓰기 전 얼굴로 마스크를 쓴 얼굴을 알아보는 일도 신기하지만 마찬가지로 그동안 한번도 만나지 못한 것도 그렇다. 서로가 서로가 맞는지 알아보고자 눈동자가 커지고 시선이 조금 더 마주치는 그런 일은 이미 흔치 않게 일어난다.


심규선 생일 광고(@홍대입구역 8번 출구), 그리고 생일 카페(@카페 333)에서


그런 비일상의 순간은 무엇인가를 좋아하길 지속할 때 더 가까운 것이 된다. 예컨대 특정한 카페에 자주 걸음하는 일이라든지. 또 이를테면 같은 아티스트를 계속해서 사랑하는 일이라든지. 이것에 대해서는 지난달에도 쓴 바 있는데, 그때 "노래 한 곡에도 마음을 의탁할 수 있구나 하고 매 순간 깨달으면서 건너왔던 시절"이라고 표현한 건 그 시절들이 현재진행형인 채로 누군가와 함께인 것일 수 있다고 경험했기 때문이다.



사건은 계절이나 우연에 의해서만 일어나지 않고 마음에 의해서도 일어난다. '그때 거기에 있지 않았다면'과 같은 과거에 대한 가정을 하게 만드는 순간들이 있다. 그때 나는 마음이 어떠한지 제대로 자각하지는 않은 채로 마치 어떤 여지를 남기듯, 그러나 거기 확실히 이끌리듯 움직였다. 이것이 어디로 향하는지 조금 더 지켜보자는 마음이었다.


문화예술을 통해서만 얻어지는 경험이 있듯, 타인과의 상호 관계를 통해서만 깨달아지는 순간이 있다. '그때 그랬다'라고 적는 일은 이내 '그때 그랬어'라고 말해주는 일이 된다. 마음을 따라가다 보니 어디선가 우리는 만났다. '혹시'나 '만약'이나 '어쩌면' 같은 부사들이 접두어가 되던 나날이 있었는데 모르는 사이 그것들은 지금으로 향하는 행로였구나.


매사 '그럴 수 있다' 혹은 '그럴지도 모른다'라고 생각하려 하는 편이다. 다시 말해 어떤 현상에 대해 빠르게 판단하는 편이기보다 몇 걸음을 디딘 후 혹은 그리하면서 조금씩 '그렇구나'에 가까워지는 편이다. 이 말은 여기가 처음부터 걸어오지 않아도 되는 길이었을지도 모른다는 뜻이다. 그러나 '행여 이 길이 아닐지도 몰라' 하는 짐작은 거기 직접 들어선 뒤의 감각을 이길 겨를이 없다. 그래서 소설가 양귀자는 일찍이 이렇게 썼다. "사랑하지 않고 스쳐 갈 수도 있었는데, 사랑일지도 모른다고 걸음을 멈춰준 그 사람이 정녕 고맙다고." (양귀자, 『모순』(1998))


공연 티켓의 예매가 열리는 오후 2시의 심박수에 대해서 쓰려다 보니 '이', '그', '저' 같은 지시어들이 늘었다. 알 수 없는 앞날과 숱한 불확실함들 속에서도. 적어도 이 길에 있는 한 나는 계속해서 당신과 우리를 지시할 것이다. 지금 여름 뒤의 가을을 만나러 가는 길이다. 혹시나 하는 물음들에 계속해서 안도하며 끄덕이고 다독일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2022.08.26.)


10월에 있을 심규선 단독 콘서트를 예매했다.

http://kko.to/oo4Q7yn_B



김동진

*인스타그램: @cosmos__j

*모임/강의 등 공지사항 외 활동 아카이브: bit.ly/cosmos__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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