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2019) 리뷰
영화 <아워 바디>(2018)에 대한 비평을 쓰면서 이렇게 적었다. "<아워 바디>에서의 ‘자영’은 일단 순수한 호기심과 궁금증으로 타자를 바라보는 것처럼 보인다. 다시 말해 바라보는 주체가 단지 여성이기 때문에 동성을 향한 그의 시선이 성적 대상화의 여지를 비껴가는 게 아니라 ‘자영’은 상대가 어떤 성별과 연령의 사람이든 간에 그렇게 바라봤을 것 같은 표정으로 상대를 보며 최희서 역시 그렇게 다양하게 해석될 여지를 주도록 연기한다." 요컨대 누군가를 바라보는 일은 성별이나 연령 등을 떠나서 그 의미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는 것. 여성 감독과 주연의 영화에서도 성적인 환상을 담은 시선이 등장할 수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데 그것은 ‘어떻게 바라보는지’에 의해서 다른 맥락으로 읽힐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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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응시하는 어떤 장면이 영화에 있을 때, 그 시선이 어떤 맥락으로 읽히는지에 관해서는 꽤 종합적인 맥락에서 분석해야 하겠다. 예컨대 어떤 응시에 ‘남성적 시선’이 담겨 있다고 할 때 그것은 대체로 여성의 특정 신체 부위를 뚫어져라 바라본다거나, 여성을 인격이 아니라 객체화시켜서 바라보는 일련의 행위들과 촬영 및 연출 방식 등을 뜻할 것이다. 오직 바라보는 사람만이 주체가 되는 것. 반면 서로의 시선이 권력과 위계에 의하지 않고 그 자체로 평등하게 다가올 수 있다면 그것은 서로가 서로를 온전히 인격적인 주체로 상호 존중하고 있다는 것을 캐릭터의 표정이나 카메라의 움직임, 캐릭터와 카메라의 거리 등 여러 영화 언어를 통해 충실히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김혜리 기자는 영화 <캐롤>(2015)에 대해 "시선의 거미줄로 촘촘히 짠 사랑의 서사"라고 언급했던 것이다.
이렇게 서론을 꺼낸 것은 셀린 시아마 감독의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2019)이 그림을 그리는 사람과 그것의 모델이 되는 사람을 주인공으로 하여 영화 내내 바라보는 일과 보이는 일 사이를 오가기 때문이다. ‘마리안느’(노에미 멜랑)는 ‘엘로이즈’(아델 에넬)의 초상화를 몰래 그리기 위해 그가 사는 섬 저택에 ‘산책 동지’로 한동안 머물게 된다. 당연히 그림을 그린다는 것도 들키지 않아야 하고, 자신이 그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도 발각되지 않아야 하기 때문에 ‘마리안느’의 ‘엘로이즈’를 향한 시선은 은밀해진다. 훔쳐본다는 건, 필연적으로 보이는 사람이 객체가 되고 보는 사람이 일종의 권력을 갖게 되는 일이겠다.
그러나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의 오프닝은 오히려 ‘마리안느’가 누군가(들)의 시선이 향하는 대상이 되어 있는 장면이다. ‘마리안느’가 ‘엘로이즈’의 초상화를 그리고자 섬에 머물렀던 것은 과거의 일이며, 영화의 첫 장면은 현재다. ‘마리안느’는 어린 학생들에게 인물화를 그리는 법을 실습시키는 중이다. 이때 ‘마리안느’는 학생들의 그림에 담기는 모델이다. "윤곽선 먼저, 다음은 실루엣. 서두르지 마." 영화가 처음 보여주는 것은 자세를 잡고 앉아 있는 ‘마리안느’의 모습이 아니라 그를 바라보며 인물화를 그리고 있는 학생들의 모습, 정확히는 학생들의 ‘시선’이다. ‘마리안느’는 “날 천천히 관찰해.”라고도 말한다. 그는 이 첫 장면의 시공간에서 철저히 관찰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물론 그림을 가르치는 스승의 위치에 있지만.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마리안느’가 과거에 그린 어떤 그림의 제목이다. 그가 다른 누군가를 ‘바라보’면서 그린 그림. 영화가 시작한 지 3분 만에,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마리안느’의 과거 속으로 들어간다. 어떤 그림, 그리고 그것을 응시하며 생각과 감정에 잠긴 ‘마리안느’의 표정, 그리고 어디선가 들려오는 바다 소리와 함께. 인물화의 모델로 자세를 취하고 있던 현재의 ‘마리안느’는 이제 과거 이야기의 주인공이 된다. 그는 지난날 어떤 시선을 경험했고 어떤 시선을 ‘행동’했을까.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에서의 그 시선이라는 건 '마리안느'와 '엘로이즈' 사이에서만 일어나지 않는다. 예컨대 거의 주연이나 마찬가지인 중요 등장인물 한 명이 더 있다. 루야나 바야미라는 배우가 연기한 이 저택의 하녀 '소피'가 바로 그런 캐릭터다. 사실상 작품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공간적 무대인 이 저택에서 '소피'는 '마리안느'와 '엘로이즈'에 가려진 조연 정도가 아니라 이야기의 중요한 부분을 담당하는 축이다.
예를 들어서 생각해 볼 수 있는 어떤 장면에서는 세 사람이 나란히 '무언가'를 하고 있다. '소피'는 자수를 두고 있고, '엘로이즈'는 저녁 식사를 준비하고 있으며 '마리안느'는 벽난로에 장작을 올리고 있다. 보통의 영화였다면 이것은 거의 명확하게 신분에 따른 구분된 행동으로 나타났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지금 이야기한 것들 전부는 셋 중 가장 낮은 신분에 해당할 '소피'가 홀로 담당했을 일이라는 것. 영화의 시선은 세 사람을 공평하게 향한다. 누군가를 더 가까이 클로즈업한다든지 서로 간의 신분 차이를 영화 언어를 통해 묘사하는 일이 여기서는 전혀 일어나지 않는다. 그 연장선에서 세 사람이 갈대숲에서 무언가를 찾는 장면 역시, 세 사람은 귀족과 화가와 하녀가 아니라 그냥 '세 명의 캐릭터'로 보인다. 권력을 규정하는 시선과 인물의 위치를 측정하는 계산에 의해서가 아니라 이들을 셀린 시아마와 클레어 마손(촬영감독)이 바라보는 단일한 프리즘은 바로 '여성' 혹은 '인격' 자체다.
물론 여기까지는 셋을 제외하면 영화에서 일정한 비중을 차지하는 등장인물이 없기 때문에 우연하게도 세 캐릭터가 고루 담긴 것이라고 볼 여지도 없지는 않겠지만, 단지 어쩌다 보니 나온 결과물이 아니라는 점은 영화의 여러 대목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앞에서 식사를 한 세 사람은 같이 책을 읽고 책 이야기를 하는데 거기에는 그리스 신화 속 '오르페우스'의 이야기를 하는 에피소드가 있다. 오르페우스는 아내인 에우리디케를 저승에서 구해오려다 하데스가 요구한 조건인 '어떤 경우에도 뒤를 돌아보면 안 된다'라는 것을 어겨서 에우리디케를 떠나보낸 인물로 그려진다. 일반적인 영화 혹은 과거의 영화였다면 '소피'는 이 이야기에 끼지 못했을 테다. 하지만 '소피'는 적극적으로 두 사람이 나누는 신화 속 이야기에 끼어든다. "돌아보면 에우리디케가 살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왜 뒤돌아봤을까요?"라고 묻기도 한다.
이 대목은 단지 귀족이어서 고상한 문학을 읽는 이야기가 아니라 영화의 주제와도 일정 부분 연결해 볼 여지가 있는 것으로 읽힌다. 셀린 시아마 감독은 "자신의 의지대로 살 수 없는 세계에서 욕망대로 살지 않는다는 건 그걸 원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다. 나는 극 중 인물에게 그들의 영혼과 몸을 돌려주고 싶었다."라고 언급한 적 있다. 그러니까 '소피'는 오르페우스가 돌아보는 일만 참으면 아내를 다시 지상에 데려올 수 있었는데 그걸 못 참고 일을 그르친 게 아니라, 오르페우스가 하데스의 그 조건을 명심하고 있었으면서도 에우리디케가 자신을 부르는 바로 그 특정한 순간에 뒤돌아볼 수밖에 없었을 이유가 있지 않겠느냐는 관점을 꺼낸 것이다. 이런 종류의 시선이 영화에는 가득 차 있다.
이 '시선에 관한 이야기'는 필연적이고도 자연스럽게 초상화를 그리는 화가의 그것으로 향한다. 관념적으로나 실제적으로나 '마리안느'는 '엘로이즈'의 초상화를 두 번 그린다. 처음 그린 그림을 본 '엘로이즈'가 자신의 생명력과 존재감이 그림에서 느껴지지 않는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왜 그렇게 평가했는가 하면 일단 '마리안느'가 처음 그린 그림은 '엘로이즈'를 '몰래' 관찰해 가며 그린 그림이라서 그러할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이유는 그 초상화를 그리게 된 목적에 있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1770년대를 배경으로 삼고 있는데, 당시에는 결혼을 하게 되면 (가부장적인) 관례적으로 신부 측에서 신랑 측에게 초상화를 그려 보냈다고 한다. 영화에서 '엘로이즈'는 남편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그는 밀라노에 산다'라는 것 외에는 전무하다. 이 결혼에서의 여성은 '남성의 결혼 상대'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결정적인 건 그 신랑이 원래는 '엘로이즈'의 언니와 결혼할 예정이었다는 점. (언니는 어떤 이유로 자살을 했다) 영화에 의도적으로 나오지 않지만 아마도 그 남자는 결혼을 '언니랑 안 되면 동생이랑 하자'라고 했을 것이다.
그 초상화는 철저히 신랑을 위해서만 그 가치가 존재하는 그림이었겠다. 당시의 화풍이나 사회적 분위기를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신부의 외모를 잘, 혹은 아름답게 보이도록 표현해야 했을 것이며 그것은 신랑 될 남자(와 그 가문)의 마음에 들기 위한 것이지 신부 될 사람을 위한 그림은 아니었을 테니까. 다시 말해서 첫 그림을 '마리안느'는 '엘로이즈'의 남편 될 사람의 평가를 의식하며 그렸을 것이고 '엘로이즈'가 보기에 그 그림은 자기답지 않아 보였을 가능성이 높겠다. 여기서 먼저 변화를 야기한 것은 '마리안느'였다. 며칠간 고생해서 들키지 않고 몰래 관찰해 가며 완성한 그림을 그 그림의 모델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한 것에 대해 화를 내면서. 이제 '엘로이즈'는 '이번엔 제대로 모델이 되겠다'라며 그림을 다시 그려달라고 한다.
셀린 시아마 감독은 "모델이라고 해서 예술의 완성에 기여하는 또 하나의 지성이자 협력자가 되지 말라는 법은 없다."라고도 언급했다. 모델이 되는 사람은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한 채 화가가 그리는 대로 작품이 완성되는 것을 수동적으로 보는 인물이 아니라 결국은 함께 작품을 창조해 내는 협업자라는 뜻이다. 이것은 그림을 그리고 있는 '마리안느'를 '엘로이즈'가 바라보면서 일어난다. 그리는 사람과 그림의 모델이 되는 사람 모두, 서로를 향해, 서로를 보이는 그대로 본다. 영화 역시 마찬가지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영화 전체가 촘촘하고 정밀하게 짜인 캔버스인 것처럼, 하나하나 조각되고 채색된 초상화이자 풍경화 같이 다가온다. 중요한 어떤 순간 몇을 제외하면 거의 사용되지 않은 스코어, 인물들의 표정과 상대를 향하는 시선을 공정하고도 사려 깊게 담아내는 카메라와 정제되었지만 계산적이지 않아 보이는, 그러면서도 예술적 비전이 생생하게 느껴지는 영화. 어떤 이야기는 끝을 알면서도 거기에 다가간다. '엘로이즈'와 '마리안느', '마리안느'와 '엘로이즈' 역시 마찬가지다. '엘로이즈'의 어머니가 밀라노로 떠난 그 며칠의 시간. 두 사람의 사랑은 두 가지 이유로 동시에 시작하고 맺어지는 것 같다. 당대의 가부장적 관습들 때문에, 그러나, 그것이 존재하는 데도 불구하고. 미리 정해진 어떤 길을 걷는다고 해서 그 길을 걸을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니니까. 어떤 누군가의 시선은 화폭으로 남아서 평생 잊을 수 없는 것이 된다. 거기 그가 있었고 나를 바라보는 그를 나 또한 바라보았기 때문에. (2020.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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