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로맨틱 홀리데이'(2006) 리뷰
자신을 바꿀 수 없다면 자신의 주변을 바꿈으로 인해 결국 자신에게 변화를 이끌어내는 일. 반복되는 일상이 단조롭게 여겨지거나 혹은 어떤 식으로든 기분 전환이 필요할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익숙한 선택이면서도 동시에 어떤 결심이 필요한 행위는 여행, 즉 환경을 전환하는 것이다. 영화 <로맨틱 홀리데이>(2006) 속 두 주인공 아이리스(케이트 윈슬렛)와 아만다(카메론 디아즈)가 하는 일이 정확히 이것이다.
영국 런던의 신문사에서 칼럼을 쓰는 아이리스는 오랫동안 호감을 갖고 있던 사내 동료 재스퍼가 다른 여성과 약혼했다는 것을 알고 슬퍼한다. 미국 LA의 영화 예고편 제작사를 운영하는 아만다는 남자친구의 외도를 알고 관계의 끝을 선언한다. 여기까지 적자면 또 흔하디 흔한 사랑 이야기인가 싶지만, 이 영화의 진짜 이야기는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서로 전혀 알지 못하던 두 사람이 인터넷을 통해 2주간 서로 집을 바꿔 지내는 휴가 계획을 세우면서 시작된다.
<왓 위민 원트>(2000), <사랑할 때 버려야 할 아까운 것들>(2003)을 비롯해 <인턴>(2015)과 같은 근작에 이르기까지 일과 사랑을 넘나드는 현대인의 보편적 소재를 섬세하게 다뤄온 낸시 마이어스 감독의 연출과 각본은 <로맨틱 홀리데이>에서도 마찬가지로 관객들의 마음을 서서히 어루만진다. 실연을 하고 홀로 보내는 크리스마스의 외로움을 달래고자 무작정 낯선 곳으로 떠나왔던 아이리스와 아만다는 얼마 지나지 않아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것은 물론 새로운 인연까지 만난다. 아이리스는 할리우드 황금기를 이끈 원로 시나리오 작가 아서 에봇과의 대화를 통해 삶의 조연이 아닌 주연의 자리를 지키는 지혜에 대해 배우고, 아만다는 집 주인인 아이리스의 오빠이자 출판 편집자인 그레이엄과의 교류를 통해 스스로를 상대에게 온전히 내보일 수 있을 때 진정한 사랑이 가능하다는 걸 깨달아간다.
영화의 어떤 장면에 이르러, 눈 쌓인 길을 조금 걷는 것도 싫어하던 아만다는 다가온 사랑을 지켜내기 위해 차에서 내려 수백 미터를 (넘어지지도 않고) 달린다. 침대 위 이불과 거의 한 몸이 되거나 벽난로 앞에서 꼼짝도 하지 않게 되기 쉬운 한겨울의 날씨는 그 자체로 모두를 위축되게 만드는 건 아니다. 상처와 두려움 속에 갇히지 않고 스스로의 마음가짐을 달리 할 줄 알거나, 낯설고 우연한 만남 속에서도 그것이 어떤 운명적인 여정이 될 것임을 직감하는 사람에게 겨울은 혹독하지 않다.
함박눈이 내리든 그렇지 않든 크리스마스는 한 해가 며칠 남지 않은 시점이라는 시기적 특성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에게 복합적인 기분을 느끼게 만든다. 거리에서 울리는 캐럴이나 화려한 트리 장식들, 그리고 눈 덮인 거리의 풍경은 어떤 이들에게는 포근함과 낭만을 가져다 주지만 또 어떤 이들에게는 그저 소음이고 외로움과 쓸쓸함을 가중시키는 것들일 뿐이다.
크리스마스 트리로 흔히 쓰이는 침엽수들이 사계절 푸른 잎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잎의 표면적이 작아 수분을 적게 소모하고 열도 적게 발산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한 겨울을 견디기 위해 잎 속 세포들은 수액의 당도를 조절해 어는점을 낮춘다고 한다. 달리 생각하면 <로맨틱 홀리데이> 속 주인공들의 이야기를 통해 생각하는 건 이런 마음이다. 어떤 인간관계에서 실패했다고 여기더라도 그것은 삶의 실패가 아니라 교훈을 얻고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으면 된다는 값진 경험이 된다. 사랑에 상처받을수록 더 따뜻하고 달콤한 사랑이 이어서 찾아오리라는 의지와 믿음을 갖게 해주는 경험. 똑같은 일상에서 이것이 어렵다면 우리가 할 일은 어디론가 훌쩍 떠나보는 일일 것이다. 가능하다면 지금 이곳과는 다른 날씨와 계절적 특성을 지닌 조금은 먼 곳으로.
낯선 여행지에서 새로운 사랑이 시작되는 <로맨틱 홀리데이> 속 이야기는 너무도 전형적이어서 예상 가능한 대목이 많지만, 문득 떠난 여행이 삶의 방향을 바꾸는 새로운 여정의 시작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알게 해주는 이야기는 연말연시에 더 각별히 닿는다. 2022년에도 충분히 기지개를 켜지 못하고 아직 위축되었을 이들에게, 낸시 마이어스 감독은 영화 속 ‘주연’들의 이야기를 빌어 당신 또한 어디서든 주연이 될 수 있다고 말해준다. 몇 달 전 좋아하는 한 소설가의 강연에서 일본 시인 미야자와 겐지의 유명한 시구를 새삼 접했다. 그 간결하고 단단한 구절을 여기에 옮기며 새해 모두의 겨울이 무탈하기를 바라본다. “비에도 지지 않고 바람에도 지지 않고.”
*본 리뷰는 기상청 기관지 <하늘사랑> 2023년 1월호에 게재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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