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2019) 리뷰
고전의 반열에 오른 작품을 볼 때 다가오는 것들 중 하나는 자연히, 영화에서 만나는 배우의 당시 모습과 현재 모습의 차이다. 1943년생인 까뜨린느 드뇌브는 20대 초반에 출연한 <쉘부르의 우산> 때의 모습과 70대 중반이 된 해에 출연한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2019)에서 전혀 다른 인물처럼 보인다. 각각의 캐릭터를 연기한 한 배우의 나이가 들었기 때문이 아니라, 캐릭터 자체가 지닌 성격과 특징 면에서 그렇게 생각된다. 이제 막 세상 밖으로 나오려는 순수하고 아름다운 사람, 그리고 여전히 아름답지만 어른의 삶에 관록 있게 무뎌지고 여러 주름들을 겪어낸 사람.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의 원제는 ‘진실, 진리’라는 뜻의 프랑스어 ‘La Vérité’이지만 국내 개봉명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은 묘하게도 배우와 배우가 연기한 캐릭터의 관계를 떠올리게 한다. ‘파비안느’는 배역명이지만 동시에 까뜨린느 드뇌브의 본명(Catherine Fabienne Deneuve)이기 때문이다.
배우의 연기는 그가 출연한 영화가 실화 바탕이든 아니든 간에 말 그대로 ‘연기’다. 재주를 펼친다는 뜻의 ‘연기’는 말하자면 ‘그 사람인 척’ 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배우는 어떤 캐릭터를 맡는 동안 아무리 짧은 기간이라 해도 정말 그 사람의 삶을 사는 것 같은 모습을 보이기 위해 캐릭터를 연구하고 말과 행동, 의상, 주변 인물들과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성격과 버릇 등을 표현해낸다.
어떤 영화에 관해서도 할 수 있는 말이기도 하겠으나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에서 까뜨린느 드뇌브가 연기한 인물의 직업이 배우라는 점에서 이것은 특별히 이 영화과 무관하지 않다. 게다가 영화의 제목이 ‘진실’이니까. (그를 연기한 배우 본인이 그랬던 것처럼) 시대를 풍미한 배우 ‘파비안느’(까뜨린느 드뇌브)가 회고록을 출간하는데 그것을 축하하기 위해 모인 가족 중 딸 ‘뤼미르’(줄리엣 비노쉬)는 그것을 읽으며 자신이 느낀 엄마의 삶과 회고록에 표현된 것이 서로 모순되거나 맞지 않다고 느낀다. 물론 이 영화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작품답게 가족에 관한 영화이며 회고록 속 삶과 실제 그 인물의 삶 사이에서 무엇이 진짜이고 가짜인지를 파헤치는 종류의 이야기는 아니다.
그것보다 중요한 건 회고록 출간을 계기로 모이게 된 가족들 특히 엄마와 딸이 서로 나누는 대화와 그 속에서 나타나는 가족의 의미를 돌아보는 어떤 일이다. 이것도 쓰고 보니 어느 고레에다 히로카즈 영화를 가지고도 해볼 법한 말 같지만, 이 영화가 특별한 건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일본에서만 해왔던 것을 프랑스로 그 무대를 옮겨서 변화를 시도해가며 이어갔다는 점에 있다. 특히 프랑스 배우들은 물론 에단 호크처럼 미국 배우도 캐스팅하면서 말이다. (이 영화 이후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한국에서 한국 배우들과 <브로커>(2022)를 찍었다. 마치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2013)를 떠올리게 하는 설정으로.) 서로 다른 언어와 문화를 경험하는 일은 마치 여러 버전의 진실을 탐구하는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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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쯤 적고 보니 서론 중의 서론일지도 모르겠다고 했던 것은 기우에 불과할지도 모르겠다. 결국 회고록을 쓴 자신 역시 자신이 ‘실제’로 살아온 삶의 모든 순간들을 전부 다 왜곡과 미화나 과장 없이 회고할 수는 없다. 아무리 주변인의 진술과 자신의 기억 그리고 사진이나 영상, 문서 자료 등에 최대한 의존한다고 하더라도 24시간 365일 수십 년 전체의 궤적과 그 안에 있는 점-선-면 전부를 복사, 스캔하듯이 표현해낼 수는 없다. 그러니 영화의 제목에 들어간 저 ‘진실’이라는 단어는 ‘파비안느’의 삶에서 무엇이 과연 진짜였는지를 묻는 말이 아니라 인생 자체에서 진정 중요한 가치는 무엇인지를 묻는 말일 것이다.
“만약 신이 있다면 그건 당신과 나 사이에 있을 거야.”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에 출연하기 24년 전 에단 호크는 <비포 선라이즈>(1995)에서 ‘셀린’(줄리 델피)에게 이런 말을 들었다. ‘제시’가 아니라 ‘에단 호크’라고도 적을 수 있는 것은 <비포 선라이즈>를 위시한 ‘비포’ 삼부작의 시나리오에 리처드 링클레이터만이 아니라 에단 호크(그리고 줄리 델피) 역시 직접 참여했기 때문인데, 영화 속 직업이 배우는 아니지만 자기가 쓴 이야기에서 자기가 주인공이 되는 모습이라니. 한 번 상상해본다.
‘파비안느’의 딸 ‘뤼미르’를 연기한 줄리엣 비노쉬도 ‘배우’를 연기한 적 있다. 크리스틴 스튜어트와 함께 출연했던 올리비에 아사야스의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2014)에서다. 아사야스 감독의 후속작인 <논-픽션>(2018)에서도 그랬다. 그러니까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은 배우를 연기한 적 있는 배우가 마찬가지로 배우를 연기하는 배우의 딸로 출연하는 영화다.
<비포 선라이즈>를 언급한 게 단순한 우연은 아닌 것이,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 속에는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다른 영화들이 그렇듯 링클레이터 영화를 떠올리게 하는 순간들도 있다. 식당 안에서 대화를 나누는 (주인공과 아무 관계도 없는) 인물들의 이야기와 표정을 유심히 담는다든가 하는 것. 그건 영화 안과 영화 밖의 경계를 조금씩 희미하게 만드는 작업들이다. 인물을 담는 두 감독의 스타일은 닮은 구석이 많다.
‘행크’(에단 호크)와 ‘뤼미르’의 딸인 ‘샤를로트’(클레망틴 그르니에)와 ‘파비안느’ 사이에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파비안느’의 집 정원에는 사람 나이로 치면 할아버지인 거북이 한 마리 있는데, 거북 이름이 바로 ‘파비안느’의 전 남편인 ‘피에르’다. ‘파비안느’는 젊었을 때 마치 <오즈의 마법사>(1939)를 연상케 하는 작품에서 마녀 역을 연기한 적이 있어서 ‘샤를로트’는 ‘파비안느’에게도 마녀 이야기를 하는데 ‘파비안느’는 장난식으로 거북의 이름이 할아버지(자신의 전 남편)의 이름을 딴 게 아니라 자기가 마법을 부려서 할아버지를 거북으로 변해버리게 만들었다는 말을 한다. 그런데 종종 거북이 등장할 때면 할아버지, 곧 진짜 ‘피에르’가 어디로 갔는지 등장하지 않고 (집에 갔다) ‘피에르’가 태연하게 가족들과 식사를 하고 있을 땐 정원에 거북이 보이지 않는 식으로 (정원 어딘가에 웅크리고 있다) 마치 ‘파비안느’가 연기한 마녀 캐릭터의 마법이 진짜인 것처럼 다뤄진다. 적어도 어린 ‘샤를로트’ 시점에서 그건 정말이겠지.
지금 언급한 에피소드와 같이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은 배우와 배우의 연기 사이의 ‘관계’ 그리고 연기한 이야기와 실제로 산 이야기 사이 관계를 파고드는 작품이다. ‘뤼미르’가 시나리오 작가이고 남편 ‘행크’는 장모와 마찬가지로 배우인 점도 그것을 더 탐구해보게 만드는데, 여기에는 몇 겹의 사소하거나 중요한 가지들이 더 뻗어 있다. ‘파비안느’는 지금 어느 SF 영화에 출연 중이다. ‘마농’(마농 끌라벨)(배우 이름과 배역명이 같다)이 우주에 나가 있다가 몇 년마다 한 번씩 지구에 돌아오는데 그의 딸은 나이가 들어 어느덧 노년이 된 반면 ‘마농’은 계속 늙지 않는다. ‘파비안느’는 바로 그 노년이 된 딸을 연기한다. 그가 이 영화에 출연하기로 한 건 ‘마농’이 자신의 친구이자 동료 배우였던 ‘사라’를 닮았기 때문이다.
“배우는 진실을 이야기하지 않아.”
‘파비안느’ 스스로는 겉으로 ‘마농’을 볼 때마다 ‘사라’를 생각한다는 걸 드러내지 않지만 ‘뤼미르’를 비롯해 주변 사람들은 그걸 알고 있다. ‘파비안느’는 주어진 대사를 그대로 외워서 하지 않고 애드리브와 즉흥적인 상황에 따른 연기를 하고, ‘마농’은 촬영 후 쉬는 시간에 ‘뤼미르’에게 연기에 관해 이야기를 한다. 시간이 조금 지나면 ‘뤼미르’는 엄마를 위해 어떤 시나리오를 쓴다. 그러니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이라는 건 그 한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람과 그의 주변 모든 사람들 간의 관계 속에서 살펴볼 수 있는 서로 간의 영향, 그리고 우리의 기억이 완벽할 수 없다는 것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가량 지금 그 SF 영화를 찍고 있는 촬영소(스튜디오)를 어릴 때 이후 오랜만에 들른 ‘뤼미르’는 “여기가 원래 이렇게 작은 곳이었나”라고 반응하는데 옆에서 ‘파비안느’는 “그게 아니라 네가 자란 거야.”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이것의 요지는, 특정한 사건과 그에 얽히거나 관계되어 있는 여러 사람들이 있다고 할 때 그 사건은 단일한 사실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그 사람들 저마다 가지고 있는, 각자의 버전의 ‘받아들여진 진실’로 남는다는 것이다. 앞서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의 발단에 해당하는 것은 ‘파비안느’의 회고록을 읽은 딸 ‘뤼미르’가 “이 이야기는 진실하지 않다”라고 말하는 대목이었다. ‘뤼미르’의 유년에 대해 자신이 기억하던 것과 엄마인 ‘파비안느’가 기억하는 것이 서로 달랐고, 이미 수십 년 전의 과거가 된 그 일에 관해 두 사람은 다른 버전의 진실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작중 ‘파비안느’가 조연으로 출연 중인 그 SF 영화와도 관련이 있다. ‘마농’이 ‘파비안느’가 젊을 때의 동료 배우인 ‘사라’를 닮았다는 점이 출연의 계기가 되었다는 언급을 이미 했다. ‘사라’는 이미 영화 속 세상에 없는 인물이다. 그런데 ‘파비안느’는 죽은 ‘사라’와의 기억 속에서 어떤 회한이 남아 있고 그것을 해소하지 못했다. 해당 내용과 ‘파비안느’가 기억하는 ‘사라’에 관한 이야기는 회고록에 적혀 있는데 그 역시도 딸 ‘뤼미르’는 다르게 기억하고 있다.
당연히 ‘파비안느’는 연기를 하는 내내, 시나리오 리딩을 하고 촬영 현장에 머물고 촬영 현장 바깥에서 영화에 대해 생각하는 내내 ‘사라’에 관해 떠올렸을 것이다. ‘파비안느’는 종종 몰입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거나 정해진 대사를 읽지 않고 애드리브를 하는 등 수십 년의 경험을 통해 관록이 쌓일 대로 쌓인 이른바 대배우의 모습과는 다른 면모를 드러내는데, 그 자체가 ‘사라’에 관해 가지고 있는 그의 복잡한 기억과 생각들을 상대 배우이자 극중 자신의 엄마 역을 맡은 ‘마농’을 보는 내내 떨쳐내지 못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처럼 외국에서 영화를 찍으리라는 생각을 한 건 아주 최근의 일이 아니어서, 그는 이미 10여 년 전부터 해외 각지에서 제안을 받았었다고 한다. 그러나 자신은 일본어 외의 다른 언어를 구사하지 못해 일본에서 일본에 관한 것만을 만들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고, 그러던 중 이 영화의 ‘뤼미르’ 역을 맡게 되는 줄리엣 비노쉬가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에게 적극적으로 프랑스 영화의 연출을 맡을 것을 권유했다고 한다. 이미 오래 전부터 출연 배우들의 팬이었던 감독은 각본을 쓰기 전부터 ‘까뜨린느 드뇌브를 엄마로, 줄리엣 비노쉬를 딸로, 그리고 에단 호크를 비노쉬의 남편 역으로 출연시키면 되겠다’라고 구상했다고도 한다. 여담이지만 아마도 그는 모국어가 아닌 외국어를 통해서만 밝혀낼 수 있는 어떤 정수가 있다고도 생각했을 것 같다.
한 가지 더 눈에 들어오는 것은 그간의 고레에다 히로카즈 영화에 비해 이 영화에 출연한 배우들은 훨씬 더 국제적인 명성을 갖고 있는 캐스팅으로 가득하다는 점이다. 영화 속에서도 그 정도로 성공한 인물들로 나온다는 점도 이례적이다. 외신과의 인터뷰에서도 이 점에 대한 질문을 받았다고 하는데, 결국 그의 답은 사회적, 경제적 지위 같은 것에 관계없이 엄마와 딸 사이에 생겨날 수 있는 문제를 다루고 싶었다는 것이다.
사람의 기억은 균일하게 나뉜 방들 중 각각의 위치에 보관되어 있어 언제든 문을 열어 꺼내어 볼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라, 매번 겹쳐지고 수정되어 결국 마지막 버전 혹은 마지막 상태의 기억을 떠올리는 일이라는 이야기를 접한 적 있다. 결국, 회고록이라는 것도 자신이 아무리 정교하고 진실하고 치밀하게 주변인들로부터의 충실한 취재와 평가까지 받아서 쓴다고 한들 모두가 받아들일 수 있는 단일한 사실일 수는 없는 것이다. 이건, 성별과 인종과 환경을 모두 떠나 어느 누구에게나 해당될 수 있다. 그래서 영화의 원제는 ‘진실’이라는 뜻의 <La Vérité>인 것이고 우리는 다만 각자가 가지고 있는 진실에 충실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2020.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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