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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진 Apr 08. 2023

어쩌다 오른 무대, 엄마들은 그들 자신이 된다

영화 '장기자랑'(2022) 리뷰

'우연히', '어쩌다 보니' 연극 무대를 함께하게 된 416 가족극단 노란리본의 엄마들은 배역을 준비하고 대본 리딩을 하는 동안에도 자신들이 세상에 혹은 타인에 어떻게 비칠지 매 순간 고민하기도 한다. 그러나 영화 <장기자랑>(2022)이 주목하는 건 연기 비전공자들이 어설프지만 유쾌하게 연극에 도전하는 과정과 (대사량이 더 많다든지 하는) 더 좋은 배역을 차지하고자 하는 엄마들 사이의 보이지 않는 신경전이나 저마다 무대에 진심으로 임하는 열정과 같은 것들이다. 모두가 무거운 기억과 책무감을 가져야 할 일도 있겠지만 그것이 그들에게 '피해자다움'이나 '희생자 엄마다움' 같은 것을 규정하거나 요구할 근거는 되지 않는다. 그렇게 몇 해의 무대를 거치는 동안, 극단의 엄마들은 그들의 아들딸들이 가고자 했거나 그렇다고 믿어지는 걸음을 대신 걷는다. 본디 배우는 타인을 가장하는 직업이지만 그들은 무대에서도 얼마든지 자신이 된다.


영화 '장기자랑' 스틸컷


시작은 이렇다. 참사 후 집 밖으로 나가지도 못했던 엄마들은 함께 커피 수업을 듣고 있었다. 선후 관계로 따진다면 정말로 커피에 관심이 생겨서, 라기보다는 상실감과 슬픔을 떨쳐내고 일상을 간신히 지속하기 위해 뭐라도 외출할 구실을 만들기 위해서, 에 가까웠겠다. 그러던 중 우연히 누군가로부터 연극 이야기가 나왔다. “재밌겠다!” 이 한마디에 정말로 극단에 합류하게 됐다. 생각지 않았던 계기로 연기를 배우고 무대는 정말로 펼쳐진다.


재난 혹은 그 이후를 다룬 영화로부터 거의 일관되게 느껴지는 감정은 남겨진 이들의 비통함이다. 그들은 떠난 이들을 기억하고, 나아가 사회나 국가가 명확히 해주지 않는 무언가를 스스로 찾아 나서기도 한다. 그러나 영화 <장기자랑>은 재난이자 사건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의 전형을 벗어나, 그리고 ‘엄마’의 전형에서도 벗어나, 무대를 앞두고 저마다의 배역을 갖게 된 엄마들이 서로의 배역을 둘러싸고 시기하거나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 다툼을 벌이거나 또 그러다 화해하는 모습들에 생생히 집중한다. 그러다 우여곡절 끝에 무대에 오르고, 사람들의 박수를 받으며 무대에서도 잠시 눈물을 흘리고 또 다른 무대를 준비한다.


참사 피해자를 타자화 시키는 대신 <장기자랑>은 연극 무대를 준비하면서 행복감을 느끼고 또 일상의 활력을 되찾는 엄마들의 매 순간을 함께한다. 머리를 노랗게 염색하는 엄마도, 고등학생을 연기하기 위해 독하게 다이어트를 하는 엄마도, 자신보다 비중이 큰 배역을 맡은 옆사람을 질투하는 엄마도, <장기자랑>을 통해 비치는 모습은 평범한 동네 이웃이거나 연극 배우의 이미지다. 이소현 감독은 “아이들을 대신하는 연극을 하면서 엄마들이 ‘배역’이라는 어떤 욕망을 갖게 되는 지점”을 발견했다고 말한다. (씨네21) “삶의 이유가 한 부분 생긴 거다. 여기에 주목해 엄마들의 삶을 들여다보았다.”라고 말하는 그의 언급은 <장기자랑>의 토대가 된다.



“'엄마가 애 보내고 나서 뭐가 그렇게 좋아가지고 저렇게 하면서 살 수 있지?'라고 얘기할 수도 있겠지만 그냥 나는 더 멋지게 살고 싶을 때도 있어요.” (영만 엄마)


영화 ‘장기자랑’ 스틸컷

극영화 대신 다큐멘터리가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장기자랑>은 한편으로 여러 상황과 인물들로부터 나오는 유머러스한 대목도 살려낸다. 실제로 <장기자랑>의 상영관 안에서는 수시로 웃음도 터져나온다. 엄마들이 여전한 기억 속에서도 일상을 어떻게든 지속해나가는 과정에 연극도 계속된다. (416 가족극단 노란리본은 최근에도 신작 ‘연속, 극’을 올리는 등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수인 엄마, 동수 엄마, 애진 엄마, 예진 엄마, 영만 엄마, 순범 엄마, 윤민 엄마 등 <장기자랑>의 무대를 함께하는 이들은 아마도 이 순간에도 어떤 대사와 표정을 연습하고 있을 것이고, 동시에 무대 밖 일상을 살아가고 있겠다. 어쩌면 영화 한 편이 할 수 있는 일은 그 자체로 많지 않지만 우리 이웃들의 이야기가, 그들 각자가 가지고 있는 고유한 삶의 사계절이 문화 예술을 매개로 더 많은 이들에게 상영되고 기억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된다.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서울독립영화제 등 초청, 2023년 4월 5일 개봉, 93분, 12세 이상 관람가.)


영화 ‘장기자랑’ 일러스트 포스터
*본 글은 영화사 진진으로부터 시사회 초대 및 소정의 원고료를 제공받아, 주관적인 내용과 평가를 토대로 작성하였습니다.


영화 '장기자랑' 스틸컷
영화 '장기자랑' 스틸컷

*영화 <장기자랑> 메인 예고편:

https://youtu.be/lHX7rtSgt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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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101creator.page.link/xhc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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