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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진 May 18. 2023

엔트로피에 쓸려 가지 않기 위하여

책 '아무튼, 정리'(2023) 후기

“나의 작은 세상은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것들로 가득 차 있다. 한번 흐른 시간은 되돌릴 수 없고, 나는 내가 한 선택의 결과를 책임지고 살아야 한다. 주변인들의 시선 역시 내가 어쩔 수 없다. 나에게 부족한 부분은 노력으로 어찌어찌 메꾼다 해도, 노력할 수 있는 역량조차 내가 타고난 것에 크게 좌우되는 느낌이다. 그렇게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것들로 가득 찬 이 삶에서, 내가 바꿀 수 있는 것들은 지금 존재하고 있는 공간뿐. 어질러진 것들을 줍고 한곳에 담아 빈 공간을 약간 넓히고, 같은 것들끼리 분류하고 모으고 정리하여 아주 조금이나마 질서를 찾아야 엔트로피에 쓸려 가지 않을 수 있다.”

(132쪽)


주한나, '아무튼, 정리'

『아무튼, 정리』(위고, 2023)는 주변 정리하기를 타고나지 않은 저자의 사적인 고백이면서 갖은 환경의 변화 속에서 나름대로의 ‘어질러짐을 받아들이기’의 요령을 터득해 온 연대기다. 이 기록은 단순히 잘 집중하지 못하는 것에 관한 화두에 그치지 않고, 깔끔함을 여성성과 결부 지어 강요하는 시선이나 청소 노동의 외주화와 같은 보다 넓은 이야기로 확장된다. 한 권의 책으로서는 챕터 간의 연결 혹은 화제 전환에 있어서 얼핏 두서없어 보이는 면이 있다가도 그것조차 책의 후반으로 향하면서 ‘정리’라는 광범위한 키워드에 대해 꺼낼 수 있는 다양한 경험담의 일환으로 다가온다. 가령 “빛이 바래고 무너지고 결국 없어질”(127쪽) 아이들의 기억의 수납장 이야기라든지, “삶의 어떤 방식은 모든 구석에서 반복되지만 그게 꼭 좋고 나쁨 중 한쪽으로만 귀결되는 것은 아님을 이제 안다.”(77쪽)와 같은 서술은 저자가 어쩌면 평생을 골몰해 왔을지 모를 ‘정리하는 삶’에 대해 어렴풋이 가늠하게 만든다.


생의 모든 것을 다 정리하고 계획한 채로 살아가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특히 환경의 대부분은 통제 불가능한 영역에 있고 다만 할 수 있는 건 예상치 못한 변화를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도 나름의 질서를 잃지 않는 일이겠다. 사소하게는 책상 정리나 분리수거일 수도 있고 그것은 나아가 방대하게 쌓여만 가는 수많은 데이터에 이름과 범주를 부여하는 일이기도 할 것이다.


주한나, '아무튼, 정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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