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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진 Nov 07. 2023

다가올 날들의 우리들도 잘 지내라며 안부를 물어올 계절

영화 ‘쉘부르의 우산’(1964)

 '별빛의 퉁퉁 부은 발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아직도 걷고 있는 이 세계의 많은 발들을 생각합니다
바다를 걷다 걷다가 결국 돌아오지 못한 발들에게는

차마 안부를 묻지 못할 거라 생각하니 사무칩니다
바닷속의 발들을 기다리는 해안의 발들이
퉁퉁 부어 있는 가을 저녁입니다'

-허수경, 「발이 부은 가을 저녁」,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에서 (문학과지성사, 2016)


트렌치코트나 우비 등을 입은 사람들이 저마다 우산을 손에 든 채 걸음을 재촉하는 풍경을 위에서 내려다보는 카메라가 영화 <쉘부르의 우산>(1964)의 문을 연다. 프레임의 상하나 좌우로 사람들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모습을 영화의 카메라가 고정된 채 가만히 지켜본다. 시작부터 이 영화는 멈춰 있는 것과 떠나가는 것의 대비로 이루어졌다.


1957년 11월 프랑스의 작은 항구도시 쉘부르. 젊은 날 한눈에 사랑에 빠져 결혼을 약속한 연인에게 이별이 찾아온다. ‘기’는 알제리 전쟁으로 징집되고, ‘주느비에브’는 “내 사랑아, 제발 떠나지 마”라고 노래하며 슬프게 그를 떠나보낸다. 당신이 없으면 내가 어떻게 사느냐는 한 사람과 아름다운 순간을 추억하며 헤어져 있어도 견딜 수 있도록 이 순간을 보내자는 한 사람의 대비가 마치 뒷일을 암시하기라도 하듯, 비 오는 가을을 지나 혹독한 겨울로 접어든다.


영화 '쉘부르의 우산' 스틸컷


70여 년 전에 만들어진 <쉘부르의 우산>은 요즘 영화, 그러니까 <라라랜드>(2016)와 같은 현대 뮤지컬 로맨스 영화의 원형처럼 평가받는다. 프로덕션 면에서도 이야기 구조와 흐름 면에서도 그렇다. 여러 해에 걸쳐 사계절이 지나고, 어떤 이의 약속은 이루어지지 못하고 누군가는 떠난다. 또 누군가가 새롭게 찾아오고, 영원할 것만 같았던 순간도 “사람 일은 모른다”는 말처럼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당신, 잘 지내고 있지?”
“그럼, 아주 잘 지내지.”


주느비에브와 기의 어떤 장면에서의 대화. 우연한 만남과 재회, 예기치 못한 헤어짐이나 뜻밖의 인연과 사건 등으로 채워진 <쉘부르의 우산>은 그러나 단지 시간은 지나고 만남은 영원하지 못하다며 체념하듯 관객의 기분을 적시는 영화라기보다 삶의 자연한 속성을 비 내리고 눈 내리는 시간의 흐름처럼 관조하는 작품에 가깝다.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장면의 모든 작중 인물 대사가 노래로 구성되어 이어지는 것도 이러한 속성을 대변한다. 90여 분의 짧은 상영시간에 어떤 이들의 일생이 담겼다.


영화 '쉘부르의 우산' 스틸컷


허수경 시인은 “영원히 역에 서 있을 것 같은 나날이었다. 그러나 언제나 기차는 왔고 나는 역을 떠났다. 다음 역을 향하여”라고 썼다.(앞의 책, ‘시인의 말’에서) 영화 초반 기차역에서 떠나는 한 사람을 지켜보는 남겨진 한 사람의 모습은 영화 후반 주유소에서 입장이 바뀐 채 멀어지거나 머무르는 두 사람의 모습과 닮아 있다. 주느비에브의 엄마는 당초 정비공으로 일하는 기의 외양만을 보고 주느비에브에게 그와의 결혼을 말리는 듯 보였으나 어떤 대목에서는 남편 없이 홀로 딸을 키운 스스로의 경험이 딸에게 되풀이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도 내보인다. 우산 가게를 함께 꾸리자는 말을 이루어지지 못하지만, 주유소를 운영하자는 말은 실현되기도 한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의 이름을 짓는 일도. <쉘부르의 우산>은 그래서 떠나가는 것만이 아니라 아직 도착하지 않은 것들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다.


세찬 비바람 부는 11월에서 시작한 <쉘부르의 우산>의 시간적 흐름은 몇 년 뒤 크리스마스를 앞둔 12월로 향해 있다. 비를 맞으며 누군가를 기다리던 시간도 눈 덮인 바깥을 내다보는 일도 저마다에게 몇 번쯤은 있었겠다. 추석이 지나자 보란 듯이 쌀쌀해진 날씨가 누군가에게는 두어 달 밖에 남지 않은 한 해를 돌아보며 아쉬움과 쓸쓸함에 젖게 만들지 모르지만, 우리가 할 것은 '주느비에브'에게 '기'가 해줬던 말처럼 소중한 순간을 흘려보내지 않으려는 마음을 잃지 않는 일이다. 벌써 추수의 계절이 지나고 이제 우리 앞에 다음 계절을 위해 힘과 마음을 비축하는 시기가 다가와 있다. 아직 도착하지 않은 열차를 향해 우리의 안부를 묻는다.


영화 '쉘부르의 우산' 국내 포스터


*본 리뷰는 기상청 기관지 <하늘사랑> 2023년 11월호에 게재한 글입니다.

https://www.kma.go.kr/kma/archive/pub.jsp?field1=grp&text1=skylove&field2=pubGroup&text2=2023#gal_year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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