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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진 Dec 03. 2023

사랑과 평화를 가져다 주는 이야기를 즐겁게 만나기

고하나 단편소설 ‘러브 앤 피스’ 리뷰

“아직 잠들지 마
우리는 현실을 사냥해야 해”
-문보영, 『모래비가 내리는 모래 서점』(문학동네, 2023) 시인의 말


<웨딩피치>와 <여인천하>와 <셜록 홈즈>와 <실낙원>과 <명탐정 코난>과 <해리포터> 등이 한데 모여 조금의 이질감도 없이 하나의 세계를 이루는 단편. 한스밴드의 노래 가사가 들려 오며 헤르미온느의 주문이 외쳐지다가도 폴 토머스 앤더슨의 이름을 가져온 듯한 ‘폴 스미스 앤더슨’이 등장하고 스타벅스 다이어리를 탐정 수첩으로 쓰는 김민주가 등장하는 이야기. 고하나의 「러브 앤 피스」는 어니스트 클라인과 스티븐 스필버그의 <레디 플레이어 원>(2018)처럼 팝 컬처의 직간접적 인용과 등장 자체가 중요한 주제라기보다는 서브컬처의 등장과 개입을 다른 목표를 위해 활용한다. 이 이야기는 오직 하나의 방향을 정한 채 처음부터 끝까지 그것을 이탈하지 않는다. “팔꿈치에 대나무 카펫 자국이 남을 정도로 재미있는 이야기를 쓸 것”(작가의 말, 122쪽). 읽는 즐거움을 주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위해 쓴 이야기.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걸까요?”라고 묻는 김다정과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걸까요?”라고 묻는 김민주와 “저희한테 혹시 어떤 소명이 주어진 건 아닐까요?”라고 묻는 김소희가 한데 모여 토론과 회의를 거듭하다가도, 「러브 앤 피스」 속 인물들은 저마다의 시각에서 해결 대신 모험을 한다. "나무의 입장이 아니라, 이 세계 전체의 견지에서 흘러가야 할 방향 같은 게 있는 거 아닐까요?" (106쪽)


“나무들이 활약하고 사랑하고 갈등하는 이야기”를 만들었던 ‘김다정과 친구들’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 SF가 혹은 SF만이 구현할 수 있는 정수에 닿는다. 이름 붙이고 역할놀이 하고 질문 하며 믿음과 취향을 형성하는 동안 그들이 만들어내고 체험하고 살아가는 이야기 모두는 진실이다. 그곳에서 고그린 공원은 ‘파라다이스 왕국’이 되고 배롱나무는 ‘사루비아’이자 ‘중전마마’가 된다.


‘이야기’의 고유함은 소재 자체에서만 오는 게 아니라 서술 방식에서도 온다. 가령 “유동 인구 많은”, “가지 꺾었던”, “껍질 벗겨진”, “악명 떨치고” 등과 같이 숱하게 관찰되는 목적격 조사를 들어낸 문장들. 구술하듯 쓰인 「러브 앤 피스」에서 이런 서술은 전혀 부자연스럽지 않고 오히려 명확한 의도로 읽힌다. 구어적 자연스러움을 부여하는 것일 수도 있고, 혹은 의도적 낯설게 하기를 통해 읽는 행위와 몰입의 밀도를 높이는 것으로도 여겨진다. (파열음들을 모두 제거한 배명훈의 단편 「차카타파의 열망으로」처럼) 즐거운 이야기를 읽을 때 우리는 더 깊게 빠져들어야 하고 그 세계의 모든 요소를 진실인 양 믿어야 한다. 사랑과 평화를 가져다 주는 이야기를 즐겁게 만나기 위해 우리는 SF를 쓰고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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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하나, '러브 앤 피스'
고하나, '러브 앤 피스'

“사루비아는 김다정의 나무였습니다. 김다정의 나무는 고그린 공원에서 유일하게 붉은 계열의 꽃을 피우는 배롱나무로, ‘목백일홍(木百日紅)’이라고도 알려졌지만 김다정과 장호영, 그리고 현지우의 세계에선 ‘사루비아’라고 불렸습니다. 인식하기 전부터 그 자리에 서 있던 것들의 뿌리는 으레 모호하게만 짐작하기 마련이지요. 그 모호한 짐작을 진실이라 믿기도 합니다.” (79쪽)


“김다정과 장호영과 현지우의 세계에서 파라다이스 왕국이 지향하는 가치는 그날그날의 놀이에 집중하는 것이었습니다. 굳이 역사의 끝을 정해놨다면 막연하게 낙원을 만들자는 건데, 어떤 낙원인지는 합의한 적 없습니다. 모두가 사랑과 평화를 획득하는 정도입니다. 하지만 그 사랑과 평화를 얻기 위해 필요한 구체적인 행위, 제도, 실행 그런 건 놀이에 없었어요. 김민주의 탐정 세계도 끝을 내다본 세계가 아니었어요. 김소희가 만든 세계의 끝은, 글쎄, 볼드모트의 죽음일까요? 이야기가 그렇게 끝나버려도 괜찮은 걸까요?” (111쪽)



*인스타그램: @cosmos__j

*모임/강의 등 공지사항: linktr.ee/cosmos__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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