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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진 Jun 21. 2023

극장에서, 다시 몇 번이고 극장에서

영화 '킬 빌 - 1부'부터 '다크 나이트'까지

*2020년 6월 24일에 쓴 글이다. '극장'의 위기 혹은 '한국영화'의 위기론이 다시 나오고 있는 요즘, (모두 외화 이야기지만) 이때의 글을 다시 떠올렸다.


영화 '킬 빌 - 1부' 중에서

본격적으로 이 글을 시작하기 앞서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영화 <킬 빌 – 1부>(2003)에 삽입된 산타 에스메랄다의 곡 ‘Don’t Let Me Be Misunderstood’를 듣고 있다. 길이만 10분이 넘는 이 곡은 원래 재즈 풍이었던 다른 사람의 곡을 편곡한 것인데 오히려 원곡보다 더 유명해진 경우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부분은 곡의 4분 지점부터 영화에 쓰인 약 1분 50초 동안이다. 주인공 ‘더 브라이드’(우마 서먼)와 숙적 ‘오렌 이시이’(루시 리우)가 눈 덮인 주점 후원을 배경으로 서로간 최후의 결전을 앞둔 장면에서. 이 곡은 정확히 ‘오렌’이 대결에 앞서 마음의 준비를 하고 예를 갖추듯 신발을 가지런히 벗는 순간부터 삽입된다. 손에 칼을 든 채 서로 거리를 두고 대치하는 30여 초 동안 영화가 의도한 바와 같이 긴장감을 훌륭히 고조시키는 이 곡은 칼집과 칼 손잡이를 양손에 각각 쥔 ‘오렌’이 칼집에서 칼을 꺼내는 바로 그 정확한 순간에 맞춰 기타음이 더해지며 분위기를 전환시킨다.


장면을 가능한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싶어 한 문단을 할애했다. 앞서 소개한 장면에 삽입된 사운드트랙을 좋아하는 이유는 음악이 익히 알려진 명곡인 탓도 있겠지만 음악이 영화에 쓰인 방식 때문, 그리고 더 실질적인 이유는 몇 번이고 들었던 그 곡이 다른 경험으로 다가온 순간이 얼마 전 있었기 때문이다. 극장은 아니었지만 거기서 나는 ‘낯선 사람들과 함께 어두운 극장 안에서 영화를 만나는’ 것과 비슷한 종류의 경험을 했다. 극장만큼은 아니어도 영상 및 음향 환경이 어느 정도 갖춰진 덕분이었다. 지금도 나는 산타 에스메랄다의 저 곡에서 4분 지점만 되면 영화 <킬 빌 – 1부>에서 해당 음악의 해당 부분이 쓰인 장면을 뇌리에 정확히 재생할 수 있다. 영화가 줄 수 있는 특별하고 고유한 경험의 한 종류는 이런 게 아닐는지.


미셸 공드리 감독의 <이터널 선샤인>(2004)이 2015년 11월 재개봉 하여 32만 명이 넘는 관객을 동원하며 2005년 국내 첫 개봉 당시의 17만 명보다도 훨씬 많은 관객 동원 기록을 남겼다. 재개봉 성적이 첫 개봉 성적보다 더 좋은 유일한 경우인 데다 이후 수많은 영화들이 재개봉 흐름을 이어가면서 저 32만 명이라는 기록은 아직 깨지지 않았다. 저 대단한 흥행이 가능했던 건 당시만 해도 시간이 오래 지난 영화를 극장에서 신작처럼 다시 만나는 일이 흔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야 본론이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다크 나이트>(2008) 역시 이미 2017년 7월에 재개봉한 적 있고 나 역시 그때 <다크 나이트>를 ‘극장에서’ 처음 봤다. 그때는 감독의 신작 <덩케르크>(2017)의 개봉 무렵이었으니 <테넷>(2020)의 개봉을 앞둔 지금도 감독의 팬층을 다분히 의식한 시기 선정일 것이다. 게다가 <배트맨 비긴즈>(2005)<다크 나이트 라이즈>(2012)까지 삼부작 모두가 서로 한 주 간격을 두고 IMAX를 비롯한 일부 극장에서 선보인다.


수많은 장면들이 지금도 회자되지만 <다크 나이트>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대목은 특히 오프닝이다. 조커 가면을 쓴 무장강도 일당이 각자의 위치에서 은행의 보안을 무력화시키고 마침내 은행의 간부와 직원 대부분을 제압하는데, 몇 분이 지난 후 스쿨버스 한 대가 은행 정문을 부수고 들어오더니 진짜 ‘조커’(히스 레저)가 등장한다. 가면을 벗고 화장을 한 ‘조커’ 자체인 얼굴을 그가 처음 드러내는 장면이 주는 강렬한 인상 자체도 물론이지만, 강도들이 은행 내부로 진입하는 과정을 단계적이고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영화의 동선과 연출은 작품 세계 안으로 관객을 인도하는 완벽에 가까운 치밀함과 장악력을 갖췄다.


재개봉을 말하고 있으니 지금 이야기하는 것이 집에서는 결코 누릴 수 없는 극장에서의 경험과 그 가치에 관한 것으로 읽힐 수 있으나, 보다 나은 설명이라고 여기는 건 특정 장면, 특정 음악 혹은 특정한 캐릭터의 첫 등장 등을 영사기로부터 나온 영화가 관객을 감싸는 ‘느낌’ 그 자체다. <인터스텔라>(2014) 개봉 무렵에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내 영화는 이해하지 말고 느껴야 한다.”라는 요지의 말을 한 적 있다. 나는 그 느낌이란 극장 스크린과 나 사이의 관계, 혹은 그 순간의 분위기라는 것에 있다고 본다.


수많은 영화들이 재개봉하고 심지어 이미 재개봉한 적 있는 영화가 ‘또’ 재개봉하기까지 하는 건 그만큼 좋아하는 영화를 극장에서 다시 만나는 일에 대해 적지 않은 관객들이 그 가치를 알고 있고 경험으로 기억하기 때문일 것이다. 2017년 7월 12일 수요일, 엔딩 크레딧이 완전히 올라간 오후 3시 27분. CGV 영등포 스타리움관 H열 36번 좌석에 앉아 있던 나는 그렇게 몇 백 편의 영화를 보고 난 후에도 새삼스럽게 ‘이게 영화구나’ 하는 생각을 했었다. 서두에 쓴 <킬 빌 – 1부>라면 몰라도, <다크 나이트>는 극장이 아니더라도 여러 플랫폼을 통해 이미 보신 분이 많을 것이다. 굳이 IMAX가 아니어도 좋다. 아직 <다크 나이트>가 ‘극장에서 본 영화’의 목록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면, 이번 기회에 거기 포함시켜 보시면 좋겠다. 나도 한 번 더 그럴 것이다. (2020.06.24.)


2020년 여름 어느 날 극장에서(@롯데시네마 신도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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