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동진 Jul 08. 2024

지금 여기가 인생의 맨 앞

여름을 맞이하는 영화들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2011)에서 결혼을 앞두고 파리에 놀러 온 작가 ’길‘은 비 내리는 파리의 거리를 사랑한다며 스콧 피츠제럴드, 어니스트 헤밍웨이, 파블로 피카소 같은 이들이 활동하던 1920년대의 그곳을 예찬한다. 곧 결혼할 사이인 이네즈와 장인, 장모와 휴가를 보내던 길은 한적한 파리를 거닐다 그만 호텔까지 가는 방향을 잃게 되고, 자정이 지나 우연히 만난 오래된 푸조 차량은 그를 정말로 1920년대 한 파티장으로 이끈다. <미드나잇 인 파리>는 과거 특정한 시대에 대한 동경을 가지고 있을 많은 이들이 한 번쯤 해볼 만한 상상을 판타지로 실현시켜 주는 작품이다.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 스틸컷


영화 속 1920년대 파리 이야기에서 눈여겨볼 대목은 정작 길이 황금기라고 생각했던 그 시대에도 사람들은 1890년대 벨에포크 시대를 그리워하고 현재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할리우드 시나리오 대신 소설을 쓰고 싶어 하는 길이 그 시대의 유명 작가들과 직접 대화를 나누는 장면도 흥미롭고 위트 있지만, <미드나잇 인 파리>에서 가장 손에 꼽을 수 있는 장면은 길이 우연히 만난 턴테이블 음반 가게 점원인 가브리엘(레아 세이두)과 함께 걷다 비를 맞는 장면이다. 그 순간이야말로 길이 오직 지금이 가장 중요한 순간이라는 걸 깨닫는 ‘순간’이다.


비 맞는 길과 가브리엘을 보면서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 <어느 가족>(2018)에서의 또 다른 ‘비 맞는 장면‘을 떠올렸다. 동네를 걷던 남매 쇼타와 유리는 장대비가 쏟아지기 시작하자 집까지 연신 달린다. 이미 옷은 흠뻑 젖은 채로. 집에 있던 오사무와 노부요 부부도 땀 흘린 채로 옷이 젖어 있기는 마찬가지다. 거실에서 냉소바를 먹다가 사랑을 나눈 두 사람은 아이들이 돌아오자 비가 와서 옷이 젖었다고 둘러댄다. 씻고 옷을 갈아입은 가족들은 마루로 나와 불꽃놀이 소리를 듣는다. 불꽃놀이가 벌어지는 곳이 앉아서 올려다보는 반대편에 있어서 빛은 보지 못하지만 그들은 소리만 듣고도 즐거워한다. 하츠에 할머니는 소리를 들으며 젊었던 시기에 본 불꽃놀이의 광경을 떠올린다.


영화 '어느 가족' 스틸컷


사실 <어느 가족>의 주인공 ‘가족’들은 혈연으로 맺어져 있지 않다. 당장 몸을 뉘일 곳이 필요하든 할머니의 연금을 탐내든 저마다 사정과 목적은 다르다. 그들을 ‘가족인 것처럼‘ 보이게 하는 건 오직 같은 공간에서 잠을 잔다는 것뿐이지만 함께 기차를 타고 해수욕을 즐기는 뒷모습이나 그걸 지켜보는 하츠에의 표정 같은 걸 ’가짜‘라고 과연 이야기할 수 있을까. 어떤 경험을 진짜이게 만들어주는 건 과거로부터 판단되거나 규정된 무엇이 아니라 바로 지금 그들에게 현재의 경험이 어떤 의미를 갖는가 하는 데 있다.


원고를 쓰는 6월 첫 주, 퇴근 후 걷는 동네의 거리에는 이맘때면 보이는 능소화들이 고개를 내밀고 있다. 능소화는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봤다. 그렇지만 올해에는 올해의 꽃이 있다. 내게는 그게 ‘지금 여름이 되었음’을 내보이는 징표 중의 하나다. 이따금 미풍이라도 불지 않으면 연신 휴대용 선풍기를 꺼내 들게 되는, 옷차림이 가벼워지고 시원한 음료를 찾게 되는 바로 그때. 그러고 보니 고레에다 히로카즈 영화에는 <브로커>(2022)에도 <태풍이 지나가고>(2016), <바닷마을 다이어리>(2015), <걸어도 걸어도>(2008)에도 여름이 잦았다. 생명이 가장 활기를 띠는 계절을 영화가 시작되기도 전부터 영화가 끝나고 난 뒤까지 그 세계에서 계속 살아갈 것처럼 믿어지는 인물들의 일상을 세밀하게 조명하기 위해 가져오는 건 꽤 자연스럽게 여겨진다.


‘하늘사랑’ 지면을 빌어 날씨와 계절에 빗대어 영화 이야기를 여러 해 동안 하고 있지만 늘 ‘여름 영화’를 고르는 일이 어렵다. 여름 내음을 풍기는 영화는 많이 있지만 삶의 무언가와 연결 지을 만한 작품은 그리 많지 않아서다. 누군가에게는 ‘벌써’ 7월일 수도 누군가에게는 ‘아직’ 7월일 수도 있다. 더위는 어찌할 수 없지만 꽃이며 하늘이며 작은 동물들을 관찰하고 바깥을 의식할 만한 작은 여유가 이 여름도 우리를 지치지 않게 만들어줄 것이다. 지치지 않은 채 보내는 지금이, 그 어느 때보다 바로 황금기가 아닐지 일깨워주는 영화들의 존재가 새삼 고맙다.


영화 '어느 가족' 국내 포스터


*본 리뷰는 기상청 기관지 <하늘사랑> 2024년 7월호에 게재한 글입니다.

https://www.kma.go.kr/kma/archive/pub.jsp?field1=grp&text1=skylove&field2=pubGroup&text2=2024


https://brunch.co.kr/@cosmos-j/319


*인스타그램: @cosmos__j

*모임/강의 등 공지사항: linktr.ee/cosmos__j

매거진의 이전글 '이제 말해도 될까, 불안도 꽃인 것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