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청설’(2024) 리뷰
<청설>(2024)에서 눈에 유심히 들어온 장면 중 하나는 바로 버스 안에서 여름(노윤서)과 가을(김민주)을 사이에 두고 용준(홍경)이 서로의 안부를 대신 확인해 주는 장면이다. 세 사람이 함께 놀러 가는 길, 가을은 여름이 아르바이트를 빠져도 되는지 용준을 통해 묻고, 여름은 역시 용준을 통해 가을의 컨디션을 확인한다. '괜찮아?'와 '괜찮아.', '괜찮대'가 오가는 이 '대화'는 수어로 이루어진다.
수어 대화에서 중요한 건 '청설'하는 일이 듣는 것이 아니라 보는 것에서 비롯한다는 점이다. 승객들로 가득한 버스 안에서 음성 언어였다면 다른 이들에게도 '들렸'을 말들이 세 사람 사이의 손짓으로만 전해지는 순간, 그건 수어를 기능어이기만 한 게 아니라 상대에게 마음을 향해야만 전해질 수 있는 감정 언어처럼 만들기도 한다. 여름-용준-가을의 순으로 일어나는 대화와 가을-용준-여름의 순으로 일어나는 대화 모두 마찬가지다.
특정 한 감각이 불능이거나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발휘되는 어떤 민감함은 가령 보지 못하기 때문에 시각을 제외한 다른 모든 감각이 극도로 발달한 마블 코믹스 캐릭터 '데어데블'의 경우처럼 미디어에서 그리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게 기능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의 소통의 일이 된다면 청각 장애와 수어가 갖는 특성은 영화언어적으로 관객에게 보여주고 들려주기 용이한 특성을 지녔다.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2017)과 <목소리의 형태>(2016)에 대해 리뷰할 때 비슷한 요지의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청설> 역시 특정 장면에서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 듯한 연출을 보여준다든지 혹은 수영장 등 같은 공간 안에서 시야의 차이를 감정 표현의 수단으로 활용한 대목 등이 돋보인다.
용준이 이어 플러그를 착용한 채 거리를 걷는 장면이 보여주듯 평소에 익숙한 감각을 일부러 낯설게 만드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 제한된 감각을 온전히 체험할 수는 없겠지만, 여기서 중요한 건 노력 자체에 있다. 누군가의 마음을 이해하기 위해 자신을 기꺼이 그 비슷한 입장 내지 환경에 놓아보는 일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마음이 통하는 건 그래서 기적이라 한다. <청설>을 보며 수어에 대해 생각하다 보니 영화 속 세 사람의 버스에서의 대화를 먼저 떠올렸고 그러다 이어 플러그를 양쪽 귀에 낀 용준의 모습도 떠올리게 되었지만, 이 이야기는 단지 감각에 대한 것만으로 한정되지는 않는 듯하다. 결국 사람과 사람 사이의 교감은 단지 상황과 환경만으로 정해지는 게 아니라 어떤 안간힘에 의해 일어나기도 하니까.
https://brunch.co.kr/@cosmos-j/364
'감각'적인 이야기는 원작이 된 영화 <청설>(2009)에 대해서도 충분히 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 영화로 넘어오면서 생겨난 차이는 단지 주인공의 이름에서만 나타나는 게 아니라 인물의 의상과 주변 풍경 등 계절감을 주는 미장센이 더해졌다는 점이 있다. 원작에서와 언니-동생 사이의 관계가 바뀐 것도 마찬가지다. (원작에서는 언니가 수영선수였지만 한국판에서는 동생이 수영선수다.)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던, 오직 동생 가을이 올림픽에 나가는 걸 보는 게 꿈이라던 여름은 용준과의 만남과 대화를 통해 그리고 작중 중후반부에 일어나는 어떤 사건을 통해 누군가의 가족이 아니라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는 일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취업을 앞두고 같은 고민을 하고 있던 용준도, 수영을 포기한 적 없었지만 언니와 같은 가족과 주변인의 시선을 늘 의식해 왔던 가을도 마치 계절이 흘러가듯 그에 상응하는 변화와 성장을 거듭하게 된다.
영화 초반부 장애인 주차구역에 불법 주차를 하고 장애인에 대한 차별과 혐오를 내재한 진상 학부모를 보여주는 에피소드 정도를 제외하면 <청설>은 청각장애라는 소재 자체를 전면에 내세우려 애쓰지는 않는다. 그보다 중요하게 다가오는 점은 원작이 국내에 한차례 재개봉했던 2018년에도 그랬지만 지금 더 귀해진, 이토록 청아하고 무해한 로맨스가 극장가를 찾아왔다는 점 자체인 것 같다. 쌀쌀한 환절기 기분 좋은 여운과 포근한 마음을 안고 극장을 나설 수 있는 좋은 작품이다.
-11월 6일 개봉, 109분, 전체 관람가
-제작: 무비락, 어나더픽쳐스
-배급: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인스타그램: @cosmos__j
*모임/강의 등 공지사항: linktr.ee/cosmos__j