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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이 뒤바뀌어도 인간으로 생존한다는 것

영화 '끝, 새로운 시작'(2023) 리뷰

by 김동진

며칠째 비가 계속되고 있는 런던, 출산을 앞둔 여자가 남편과 전화통화를 하며 욕조에 물을 받는 일상적인 풍경으로 영화 <끝, 새로운 시작>(2023)은 시작된다.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던 비는 폭우가 되고, 불안한 기운으로 밖을 비추던 영화의 카메라가 향한 곳은 마침내 문틈으로 빗물이 스며들기 시작한 여자의 집안 바닥이다.


영국의 작가 메건 헌터가 쓴 동명의 소설을 각색한 영화 <끝, 새로운 시작>은 기후 변화가 일상이 된 시대 한 가족의 풍경을 주인공 ‘여자’(영화 속 배역명이 ‘Woman'이다)의 내면을 중심으로 조명한다. 다만 소설에서는 해수면 상승으로 런던이 물에 잠긴 것에 비해 영화에서는 거듭된 폭우가 일으킨 홍수로 설정이 조금 변화되었다. 배가 불러온 주인공이 예정하던 일자보다 일찍 츨산을 하게 되는 것과 동시에 삶의 터전이었던 집은 통째로 물에 잠기게 되고, 저지대에 있던 병원마저 병동을 비우고 모두 대피해야 한다는 지침이 내려오자 여자와 남편 그리고 갓 태어난 아들 ‘젭’(영화 속에서 유일하게 이름이 있다)는 차를 달려 런던 외곽에 있는 남편의 부모의 집에 도착한다.


<끝, 새로운 시작>에서 특징적인 요소는 일반적인 재난 영화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풍경들이 최소한으로 묘사된다는 점이다. 장기화된 피난 생활로 식량난이 극심해져 한정된 배급 식량을 차지하려는 군중들의 경쟁과 그로 인한 피해가 일부 비치는 것 정도를 제외하면, 정부 또는 군 관계자가 등장해 상황의 심각성을 대사로 설명하거나 하는 장면이 없다. 대신 주인공이 라디오 뉴스로 듣는 일부 정보와 함께 집에서의 생활이 몇 달이 지나자 식량이 거의 다 떨어져 가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주방 수납장의 점프컷 정도가 추측과 짐작을 가능하게 할 따름이다. 영화를 보는 관객 역시 영화 속에서 실제 재난을 겪고 있는 주인공과 거의 비슷한 정도의 정보를 갖게 됨으로써 기후 변화가 주는 실체 불확실한 공포감을 은연중에 전염시킨다.


bodo_still_07.jpg 영화 '끝, 새로운 시작' 스틸컷


하나 더 제거된 풍경은 밑바닥을 보여주는 듯한 사람들의 군상이다. 저 혼자만 살기 위해 타인을 배제하는 소위 ‘빌런’ 캐릭터 같은 건 이 영화에서 보기 어렵다. 대신 영화가 주목하는 인간다움이란 살고 있던 집을 잃고 정처 없이 떠돌게 되는 상황에서도 주인공인 여자가 오직 자기에게만 의지하는 젭을 보며 겨우 생존하고 일상을 지켜나가는 모습에서 포착된다. 다시 말해서 재난은 터전을 앗아가고 모든 걸 집어삼키기도 하지만, 살아 있는 한 홍수에도 잠식되지 않는 것도 있다는 것. 갓 태어난 아기가 오직 먹고 (싸고) 자고 우는 데에만 전념하는 동안 하루가 다르게 자라나는 것처럼, 엄마가 될 준비 같은 건 되어 있지 않았던 여자도 성장한다.


기후 변화에 대해 직접적으로 설명하거나 경고하지 않지만 <끝, 새로운 시작>은 모든 걸 포기하기 쉬운 재난 뒤의 풍경을 통해 그럼에도 무기력이 일상을 잠식하지 않은, 비일상의 상황에서도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음을 계속해서 믿는 사람들의 유대감과 온기에 주목한다. 영화가 재난의 크기와 파괴력에 주목하다 보면 평범한 사람들의 사소한 일상은 흔히 축소되거나 제거되지 마련이지만 역설적으로 그 흔한 일상을 클로즈업으로 담으며 차분히 환경의 변화를 로드무비처럼 따라가는 영화가 주는 묘한 위안이 있다.


l_still_02.jpg 영화 '끝, 새로운 시작' 스틸컷


<끝, 새로운 시작>의 영화화 판권을 구입하고 제작자로 참여한 베네딕트 컴버배치는 도로가 끊어지고 축구장만 한 땅이 꺼질 만큼의 폭우가 실제 내리기도 한 런던의 풍경을 떠올리며 이 이야기가 가지고 있는 현실성과 그 묘사 방식에 큰 충격을 받았다고 언급한다. 여기에 BBC 드라마 [킬링 이브] 시리즈 등으로 주목받은 배우 조디 코머의 내밀하면서도 힘 있는 연기가 이름이 제거된 주인공의 모든 장면에 설득력을 부여한다. 35mm 필름으로 촬영된 영화 <끝, 새로운 시작>이 스크린에 담는 이미지는 이 이야기가 그리 먼 미래의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독특한 질감을 선사해주기도 한다.


기후 변화를 담는 다양한 스토리텔링이 영화와 TV 시리즈, 소설 등에서 펼쳐지고 있지만 우리는 그럴수록 인간이 무엇으로 생존을 넘어 존엄할 수 있는지 성찰하고 일상의 변화를 대비하되 비관과 희망 사이에서 후자에 무게를 실을 수 있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끝, 새로운 시작>의 엔딩 크레디트 속 ‘젭’을 연기한 15명의 아기들의 이름을 보며 상기한다. 그래서 끝 바로 뒤 시작이라는 단어가 자연스럽다.



m_poster.jpg 영화 '끝, 새로운 시작' 메인 포스터

*본 리뷰는 기상청 소식지 <하늘사랑> 2025년 5월호에 게재한 글입니다.

https://www.kma.go.kr/kma/archive/pub.jsp?field1=grp&text1=sky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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