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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진 Oct 22. 2017

사랑,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힘

<나의 엔젤>(2016), 해리 클레븐

실은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는 주제와 이야기일 거라고 생각했다. [어린 왕자]의 중요한 구절 중 하나인 "내 비밀은 이거야. 아주 간단해. 마음으로 보아야만 잘 보인다. 중요한 것은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다."(황현산 역, 90쪽, 열린책들, 2015)라는 문장을 기억한다면 말이다. 앞이 보이지 않는 소녀인 '마들렌'의 캐릭터는 적어도 사랑의 속성을 전달하기 위한 것처럼 보인다. <나의 엔젤>은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사랑에 빠지는 주인공이 몸이 투명한 소년 '엔젤'이라는 것. 이미 앞이 보이지 않는데 사랑에 빠지는 상대가 굳이 몸이 투명한 인물인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시놉시스를 통해 대강의 전개를 이미 파악하고 있었지만, 이 영화의 질문은 거기서 출발하는 것 같다.


폴 버호벤의 <할로우 맨>(2000)처럼, 몸이 투명하다는 것은 일종의 대단한 능력으로 여겨지거나 혹은 범죄의 무기로 악용되기까지 한다. 아마도 이는 '투명인간'하면 흔히 떠올릴 법한 모습이다. 다만 <나의 엔젤>에서는 그렇지 않다. 영화의 시놉시스를 통해 주지하다시피, '마들렌'이 눈 수술을 받으면서 얼마의 시간 후 시력을 회복하게 되기 때문이다. '마들렌'이 앞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주변에 친구가 없었던 것처럼 '엔젤' 역시 몸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자신의 부모 외에는 누구와도 가까워질 수 없는 캐릭터라는 점은 여기서 사랑이라는 감정의 경이를 대변하기도 하며 동시에 '볼 수 있게 된 마들렌'이 정작 '엔젤'은 볼 수는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는 점은 인물과 관계에 시련을 주는 훌륭한 장치처럼 기능한다.



'엔젤'은 자신을 느끼지 못한다는 '마들렌'에게 이전처럼 다시 눈을 감아볼 것을 제안한다. 인위적으로나마 보는 감각을 다시 제한한다는 것은 마음으로 느끼는 것의 의미를 강조하는 것이다. 여기서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마들렌'의 시선이 아닌 '엔젤'의 시선을 대변하는 영화의 카메라는 보이지 않는 그의 존재 대신, 그가 영향을 미치는 이 세상의 존재에 주목한다. 그가 만지는 물건, 그가 보는 사람, 그의 움직임이 낳는 잔상과 같은 것들 말이다.


사랑이라는 추상적인 개념 자체는 물론 눈으로 보거나 손으로 그 자체를 만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사랑'이 거기 있다는 걸 실감할 수 있는 이유는 그 사랑이 낳는 작용 때문이다. 사랑하는 상대가 나에게 건네는 따뜻한 말 한 마디, 함께하며 축적되는 경험들, 때로는 상대의 육체 역시 그런 역할을 한다. 그렇다면, 어쩌면 우리가 경험하는 건 사랑 자체가 아니라 그것의 부속물들뿐인 것일까. 적어도 <나의 사랑>의 결론은 그렇지 않다. 사랑이라는 거대한 사건이 생에 찾아온다고 할 때, 그로 인해 발생하는 모든 일들은 사랑을 구성하는 일부다. 이쯤에서 "넌 내가 존재한다고 느끼게 해준 유일한 사람이었어"라는 '엔젤'의 말을 떠올린다. 실은 '나'는 스스로는 거울이 없으면 내 얼굴조차도 볼 수 없다. 그런데 누군가가 나를 봐주는 순간 비록 나는 못 보지만 내가 존재한다는 걸 알 수 있다. 사랑이란, 그런 천사 같은 것이다. (★ 8/10점.)


<나의 엔젤>(Mon Ange, 2016), 해리 클레븐

2017년 10월 12일 (국내) 개봉, 80분, 청소년 관람불가.


출연: 플뢰르 제프리어, 엘리나 로웬슨, 마야 도리, 한나 부드로, 프랑소와 빈센텔리 등.


수입: (주)퍼스트런

배급: CGV 아트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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