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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힘

<나의 엔젤>(2016), 해리 클레븐

by 김동진

실은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는 주제와 이야기일 거라고 생각했다. [어린 왕자]의 중요한 구절 중 하나인 "내 비밀은 이거야. 아주 간단해. 마음으로 보아야만 잘 보인다. 중요한 것은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다."(황현산 역, 90쪽, 열린책들, 2015)라는 문장을 기억한다면 말이다. 앞이 보이지 않는 소녀인 '마들렌'의 캐릭터는 적어도 사랑의 속성을 전달하기 위한 것처럼 보인다. <나의 엔젤>은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사랑에 빠지는 주인공이 몸이 투명한 소년 '엔젤'이라는 것. 이미 앞이 보이지 않는데 사랑에 빠지는 상대가 굳이 몸이 투명한 인물인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시놉시스를 통해 대강의 전개를 이미 파악하고 있었지만, 이 영화의 질문은 거기서 출발하는 것 같다.


폴 버호벤의 <할로우 맨>(2000)처럼, 몸이 투명하다는 것은 일종의 대단한 능력으로 여겨지거나 혹은 범죄의 무기로 악용되기까지 한다. 아마도 이는 '투명인간'하면 흔히 떠올릴 법한 모습이다. 다만 <나의 엔젤>에서는 그렇지 않다. 영화의 시놉시스를 통해 주지하다시피, '마들렌'이 눈 수술을 받으면서 얼마의 시간 후 시력을 회복하게 되기 때문이다. '마들렌'이 앞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주변에 친구가 없었던 것처럼 '엔젤' 역시 몸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자신의 부모 외에는 누구와도 가까워질 수 없는 캐릭터라는 점은 여기서 사랑이라는 감정의 경이를 대변하기도 하며 동시에 '볼 수 있게 된 마들렌'이 정작 '엔젤'은 볼 수는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는 점은 인물과 관계에 시련을 주는 훌륭한 장치처럼 기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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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젤'은 자신을 느끼지 못한다는 '마들렌'에게 이전처럼 다시 눈을 감아볼 것을 제안한다. 인위적으로나마 보는 감각을 다시 제한한다는 것은 마음으로 느끼는 것의 의미를 강조하는 것이다. 여기서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마들렌'의 시선이 아닌 '엔젤'의 시선을 대변하는 영화의 카메라는 보이지 않는 그의 존재 대신, 그가 영향을 미치는 이 세상의 존재에 주목한다. 그가 만지는 물건, 그가 보는 사람, 그의 움직임이 낳는 잔상과 같은 것들 말이다.


사랑이라는 추상적인 개념 자체는 물론 눈으로 보거나 손으로 그 자체를 만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사랑'이 거기 있다는 걸 실감할 수 있는 이유는 그 사랑이 낳는 작용 때문이다. 사랑하는 상대가 나에게 건네는 따뜻한 말 한 마디, 함께하며 축적되는 경험들, 때로는 상대의 육체 역시 그런 역할을 한다. 그렇다면, 어쩌면 우리가 경험하는 건 사랑 자체가 아니라 그것의 부속물들뿐인 것일까. 적어도 <나의 사랑>의 결론은 그렇지 않다. 사랑이라는 거대한 사건이 생에 찾아온다고 할 때, 그로 인해 발생하는 모든 일들은 사랑을 구성하는 일부다. 이쯤에서 "넌 내가 존재한다고 느끼게 해준 유일한 사람이었어"라는 '엔젤'의 말을 떠올린다. 실은 '나'는 스스로는 거울이 없으면 내 얼굴조차도 볼 수 없다. 그런데 누군가가 나를 봐주는 순간 비록 나는 못 보지만 내가 존재한다는 걸 알 수 있다. 사랑이란, 그런 천사 같은 것이다. (★ 8/10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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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엔젤>(Mon Ange, 2016), 해리 클레븐

2017년 10월 12일 (국내) 개봉, 80분, 청소년 관람불가.


출연: 플뢰르 제프리어, 엘리나 로웬슨, 마야 도리, 한나 부드로, 프랑소와 빈센텔리 등.


수입: (주)퍼스트런

배급: CGV 아트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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